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혹한의 맛 농사, 김

우리가 도시에서 안락하게 지내고 있을 때도 누군가는 먹이기 위해 생산한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일하는 이들이 있다. 겨울바다의 낭만을 얘기한 이가 누구던가.

서울에서 가장 먼 정남진, 장흥의 바다에 와본다. 혹한에도 ‘농사’가 있다. 김 작업이다. 바삭하게 구워 고소한 김, 언제나 맛있는 김밥의 재료인 김은 겨울의 추위를 뚫고 만들어진다.

바다에 나갔다. 묵묵히 김을 뜯고 나르는 이들의 작업복 위로 파도가 튀어 그대로 얼어버린다. 바람이 귀를 잘라버릴 듯 매섭다. 바람소리가 거세어 옆사람과 대화가 되지 않는 엄중한 작업환경이다. 김은 광합성을 한다. 대개의 해조류가 그렇지만 해를 봐야 자란다. 그렇다고 계속 햇빛을 잘 쬔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바닷속에 들어가 영양물질을 먹어 살찌고, 햇빛을 쬐면서 광합성을 한다.

장흥은 우리나라 김 생산의 4~5%를 겨우 차지하는 적은 산지다. 겨울의 차가운 바다라야 해조류는 품질이 좋아지고, 성장한다. 가을에 김을 부착시켜 기르기 시작하는데, 작년 11월 기상난동으로 올해 김 농사는 영 좋지 않다. 김 농사는 하느님과 동업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날씨가 좋은 김을 만드는 절대 조건이기 때문이다. 해조류는 바닷속에서 제각기 자기 구역을 지닌다. 수면에서부터 김, 파래, 매생이 순이다. 이들이 제자리를 지키지 않고 뒤엉키면 생육이 더디고 품질이 나빠진다. 사이좋게 자기 분수대로 살아간다.


어려서 겨울이 되면 김을 기다렸다. 요즘처럼 조미가 다 된 이른바 식탁 김을 봉지만 뜯어 올려놓고 먹을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연탄불에 들기름 바른 김을 한 장씩 구웠다. 너무 태우면 쓴맛이 나고, 너무 멀리서 구워 설익히면 비렸다. 적당하게 김을 뒤집는 기술이야말로 중요했다. 아마 그때 나의 요리사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 같다. 어머니는 가게에서 김을 사오라고 시켰는데, 그걸 온전히 집까지 가져오질 못했다. 고소하고 향기로운 김을 한두 장 뜯어먹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알게 되면 경을 쳤다. 꾀를 내어 김의 귀퉁이만 뜯어서 먹었는데, 결국은 들키게 마련이었다. 간혹 어머니가 여러 가지 채소와 분홍색 소시지를 넣은 김밥을 해주셨다. 밥과 요리한 고명을 차례로 얹고, 돌돌 말아 썰어내면 완성되는 멋진 김밥의 맛이란!

당시 김은 아주 귀한 재료였다. 수십년 동안 김값은 거의 오르지 않는 것 같다. 그 덕에 그 향기롭고 맛있는 김을 언제든지 먹을 수 있게 됐다. 결핍은 애정을 낳는 법, 김이 흔해져서 오히려 가치를 모른다. 김은 영양분이 아주 많고 위에 부담도 주지 않는다. 산지에서 하는 말로는 김 농사 짓는 사람들은 바닷바람에도 피부가 트지 않는다고 한다.

요새 맛있는 김이 시장에 나오고 있다. 촘촘하고 까만 참김으로는 김밥을 싸고 반찬을 하면 좋고, 성기고 거친 맛의 돌김은 술안주로 그만이다. 간혹 말리지 않은 물김을 구한다면 굴을 넣고 끓여보시라. 시원한 맛이 그만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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