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돼지곱창을 씹으며

최근에 잡다한 음식이야기를 묶어 책을 한 권 냈다. 저자의 말을 쓰는데, 문득 중학교 친구들이 생각났다. 언제든 들르면 김치반찬 두 가지에 커다란 밥통-배삼룡이 선전하던 유니버설 전자밥통-하나를 몽땅 비우던 친구, 설탕과 마가린을 발라 한 줄짜리 식빵을 함께 먹어치우던 친구, 반찬이라고는 들기름에 볶은 묵은지가 고작이던 친구, 도시락반찬으로 늘 김치만 싸오던 친구. 녀석들이 생각나서 한 사람씩 호명하며 글을 쓰다보니 눈물이 났다. 그때 한 친구의 어머니는 황학동 중고시장에서 돼지곱창을 팔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비로소 음주면허를 받아 늘 그 집에 가서 술을 마셨다. 돼지의 작은창자를 씻어서 당면과 갖은 채소, 매운 양념에 버무려 볶은 음식이었다. 값도 엄청 싸서 소주 두어 병에 안주를 먹어도 재수생 주머니로 감당할 수 있었다. 늘 배고프고 술 아쉬운 근처 노동자들이 들렀다. 당시 이 시장은 서울의 가난한 이들이 몰려들어 물건을 사고팔았다. 개미처럼 부지런한 이들이 바글거린다고 하여 속칭 개미시장이라고도 불렀다. 돼지곱창은 이 동네의 명물이 되었다.

어느날 오랜만에 들렀는데 친구네 가게 뒤쪽이 허전했다. 가게 바로 뒤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허름하게 줄지어선 노점 같은 가게의 한 턱을 깎아버린 것이었다. 발만 잘못 디디면 그대로 떨어져버릴 듯한 공간에서 상인들은 악착같이 돼지곱창을 볶아 팔았다. 주걱으로 양념을 버무려 날쌔고도 푸짐하게 퍼주는 매콤한 맛의 요리가 아주 맛있었다. 조미료와 설탕으로 주로 맛을 냈지만, 그것이 아니고서 냄새나는 돼지 내장을 어떻게 먹을 수 있었을까.


인근에는 주로 중고 주방용품을 취급하는 중앙시장이 있다. 황학동 개미시장과 중앙시장은 청계천 끄트머리에서 가난한 이들을 먹여살리는 거대한 힘이었다. 지금도 중앙시장은 서울의 생계형 요식업을 떠받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순대찜통, 노점 리어카에 설치하는 구이판과 붕어빵기계, 뻥튀기와 어묵통을 제작해서 파는 몇 안되는 시장이다. 번듯한 고급식당용 기물보다 노점과 소규모 밥집과 술집에 쓰는 물건들을 판다. 거리를 걷다보면 허름한 차림새의 시민들이 생계를 이을 장비를 사볼 요량으로 흥정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어디선가 가게에서 쓰다가 나온 중고 물건들일 것이다. 허름하게 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물건이 짠해서 차마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는 저 물건으로 힘겹게 식구를 부양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식당을 문닫고 물건을 헐값에 처분하며 절망에 가슴을 쳤을 것이다.

어려운 경기가 오래되었다. 실직이 이어지고 실업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그나마 먹는장사가 밑천 적게 들고, 쉬워보이니 새로운 음식노점과 식당이 늘어난다. 또 그만큼 좌절하고 실패하며 가게문을 닫고 리어카를 팔아치울 것이다. 누구든 이 거리에서 이틀만 지내면, 경기의 밑바닥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힘들다. 4만달러 소득과 경제성장을 외치는 이때, 시장은 아직 춥다. 오랜만에 시장을 들렀더니 재개발의 틈새에서 돼지곱창 파는 집들이 건재했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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