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MSG 냉면도 맛있다

이 땅에서 냉면 얘기 잘못 꺼내다가는 십자포화(?)를 맞는다. 다른 건 몰라도 냉면은 이른바 미식가의 자존심 같은 거다. 나는 요리사이니, 직접 만들어 먹어보기로 했다. 북한 책을 먼저 참고한다. 대개 두 가지 요리법이 나온다. 동치미나 김치에 고깃국물을 섞는 방법이 있고, 고깃국물과 ‘맛내기’(MSG)를 넣는 것이 핵심인 요리법이 어깨를 겨룬다. 고깃국물을 내는 것도 배합비율이 여러 가지다. 소, 돼지, 닭을 골고루 쓰는 것과 소와 돼지만 쓰는 것이 대종을 이룬다. 지금 막 동치미가 맛있게 익었으니,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삶아 국물을 섞어본다.

문제는 면이다. 냉면은 메밀을 많이 써서(보통 전분과의 비율이 7 대 3이나 8 대 2) 단단하게 반죽한 후 압력으로 내리는 것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가정에는 그런 ‘압출식’ 장비가 없다. 별 수 없이 반죽한 후 칼국수처럼 칼로 썬다. 보다 원시적인 제면법이다. 동치미와 고깃국물을 1 대 1로 섞은 후 면을 말아본다. 두근두근하다. 과연 무슨 맛일까.

역시 면의 맛이 떨어진다. 시중 가게에서 파는 완성품 면을 사서 다시 말아본다. 메밀이 적게 들어서 제맛이 안 난다. 그래도 제법 비슷하다. 시원한 동치미의 첫 감칠맛이 ‘쩡’ 하니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온다. 이내 구수한 고깃국물이 따라온다. 휘휘 면을 저어 한입 미어지게 넣는다. 제법 맛있지만, 사 먹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냉면집에 물어보니, 옛날에는 면을 사가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집에서 면 만들기가 어려우니 김칫국물에 사가지고 온 냉면을 넣어 먹었다는 것이다. 부산의 한 냉면집 아저씨는 여름만 되면 앓아누웠다고 한다. 면을 일일이 힘으로 눌러 뽑아서 팔았는데, 면만 사가는 사람들 때문에 하루종일 면틀을 누르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는 술회다. 이제는 자동 기계가 있어서 그런 고생은 안 한다. 어찌 되었든 좋은 면을 구하기 어려워서 나는 보통 밀국수를 써서 말아 먹는다. 부산 밀면의 탄생과 흡사하다. 메밀면 대신 전분과 밀가루를 써서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부산 밀면의 역사가 되었다. 궁하면 통하는 법이다.


나는 이제 평양식 동치미 고깃국물에 국수를 넣어 먹는다. 이건 뭐라고 불러야 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맛은 제법이다. 마지막 국수 한 올, 국물 한 방울까지 삼킨다. 돼지고기에 동치미만 섞어도 맛있다. 돼지 앞다리살 한 근을 삶으면 4인 가족이 충분히 냉면 분위기를 낼 수 있다. 물론 동치미가 없다면 고깃국물만 내고 ‘맛내기’를 더해도 된다. 냉면은 거개 이런 요리법이니까 말이다.

냉면은 원래 겨울 시식이다. 김치가 익고, 농한기가 되어 마을 장정들이 면을 누를 수 있는 여유가 생겨야 먹었다. 메밀이 늦가을에 수확하는 작물이라는 것도 한몫했다. 일제강점기 무렵에 제빙기가 보급되고, 도시가 발달하면서 여름 음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전통의 겨울 냉면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새 냉면집에 가면 한가하게 좋은 서비스를 받으며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침이 고인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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