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족발 먹기

장충체육관이 새 단장을 하고 문을 열었다. 가까운 동대문운동장은 사라져버렸으나 이 체육관은 꿋꿋이 살아남았다. 안 그래도 서울운동장에서 이 체육관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한민국 스포츠의 메카였다. 지금은 상암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서울운동장에는 축구장이 있었다. ‘국대’ 경기가 있는 날이면-차범근이 자신의 진가를 보인 곳도 바로 이곳-기마경찰까지 동원해서 인파를 정리했다. 위엄있는(?) 말이 천천히 주둥이로 인파를 밀어내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암표 장수가 돌아다녔고, 간식을 파는 리어카가 운동장을 모두 둘러싸기도 했다.

야구는 또 어땠는가. 고교야구라도 열리는 날에는 가까운 평화시장까지 행진하는 동문들로 미어터졌다. 교가와 응원가가 울려퍼졌고, 라이벌 학교끼리 장외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충체육관은 농구대잔치가 정말 대단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대학팀과 프로급의 실업팀이 대등하게 맞붙었다. 중앙대와 연세대는 현대, 삼성 같은 팀을 위협했다. 이충희, 박수교, 신선우, 한기범, 유재학, 김유택, 허재…. 언젠가 장충체육관 앞 족발집을 취재한 적이 있다. 주인 할머니는 신이 나서 그 시절의 추억을 얘기했다. 농구 경기가 끝나면 키가 장대 같은 선수들이 들이닥쳐 족발을 먹었다. 응원단도 자리를 채웠다. 동문들끼리 족발을 뜯으며 경기를 복기하고, 술을 마셨다. 지나가던 교복 입은 후배들은 영문도 모르고 자리에 끼어 공짜로 족발을 얻어먹기도 했다. 이겨도 한 잔, 져도 한 잔. 곁다리로 나오는 시원한 콩나물국으로 속을 달래며 그렇게 보낸 세월이 있었다.


장충동 족발골목은 평안도에서 내려온 한 부인이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장사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 원래 족발은 이북에서 많이 먹었다. 부산물이어서 그런지 역사책에도 별로 등장하지 않아 그 역사를 추적하기가 어렵다. 보통 평안도, 황해도의 명물이라는 기록 정도가 있다. 황해도에서는 엿을 조려 족발에 버무려 먹었다고 한다. 족발 먹는 유행의 역사는 중국에서 받아들였다는 얘기가 있다. 이북에서 족발이 유명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중국은 족발을 다양하게 요리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 만두를 먹고 뜨거운 ‘육즙’이 흘러내렸던 경험이 있다면, 십중팔구 그것은 족발의 젤라틴이다. 차가울 때는 굳고 뜨거우면 녹는 족발의 성질을 이용한 만두소인 것이다. 족발을 냉채로 먹는 것도 본디 중국식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도 족발은 꽤 많이 먹는다. 족발 살을 모두 발라내어 소시지를 만든다. 유명한 테너 파바로티의 고향인 이탈리아 모데나의 명물이기도 하다. 돼지는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주면서도 미움을 받았다. 풀만 먹는 소와 달리 인간과 먹이 경쟁을 하는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족발까지 뜯으면서 우리는 돼지의 한 생애를 생각한다. 한 가지 부탁. 족발 배달을 시키고 싶거든, 스마트폰의 앱을 열지 마시고 동네 족발집에 전화를 걸어 시키시길. 몇 푼 남지도 않는 음식값에서 수수료 내고 나면 뭐가 남겠는가.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타면  (0) 2015.02.26
서산냉이  (0) 2015.02.12
MSG 냉면도 맛있다  (0) 2015.01.29
두부요리 두 그릇  (0) 2015.01.22
돼지곱창을 씹으며  (0) 2015.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