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14) 오현경 - 광고출연 ‘0’

1961년 12월 KBS TV가 개국하면서 TV 드라마는 거의 대부분 학생극 출신의 젊은 연극인들이 관여했다. 연출하는 이는 직원으로, 배우들은 출연자로 나섰다. 그 당시 탤런트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극단에 들어간 곳은 거의 모두 나처럼 학생극 출신의 선후배가 모인 동인제 극단이어서 출연료는 고사하고 공연 제작비를 마련하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방송에서 출연료를 주니 그걸로 생활하면서 연극을 하자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1964년 동양방송(TBC TV)이 상업방송으로 개국하면서 대다수 사람들이 그곳으로 옮겨갔다. TBC TV는 송출범위가 서울·인천 주변과 부산·마산 주변 지역에 한정됐지만 상업방송이어서 그런지 인기 드라마가 생기고 인기 탤런트(이 무렵부터 탤런트라는 말을 썼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여파로 점차 동인 개념도 깨지고 인기도의 차이가 생기면서 연기자 사이도 서로 어색하게 됐다. 

그래서 나는 극예술을 하겠다는 초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 방법으로 출연료를 받고 드라마 출연은 하지만 내 얼굴을 직접 상품으로 내놓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경향신문 DB>
 
그런데 두 달도 못돼 어느 제약회사의 약 광고모델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모델료 120만원! 당시로선 엄청난 돈이었다. 내가 그런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안 하겠다고 하면 이해도 못할 뿐 아니라 웃음거리가 될 듯하여 말도 안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요구해서 포기하도록 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지금은 돌아가신 분장사 전예출 선생이 시종 끙끙거리면서 못 마땅히 계시더니, 그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너 미쳤니?”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결혼하여 집을 마련하려고 보니, 그 당시 마포아파트는 7평짜리 독신자 아파트라 너무 좁고 이촌동에 공무원아파트가 있었는데 15~18평의 가격이 45만~48만원이었다. 결국 돈이 없어 구매를 포기하고 친구집 2층에 세들어 살았다. 한데 일본식 집이라 벽이 얇아 추웠다. 갓 낳은 딸의 코가 빨갛게 얼어 마음이 다급해져서 이촌동 공무원아파트로 옮겼는데 돈이 부족해서 빚을 내어 보태서 샀다. 눈 딱 감고 1년 동안 TV 광고에 얼굴 내밀고 그 돈을 받았더라면 두 채를 사고도 남았을 텐데…. 
 
<경향신문 DB>

그러나 그 후로도 나는 여러 차례 광고출연 제안을 받았으나 오늘까지 한번도 그 고집을 꺾지 않았다.

사고방식이 세련되지 못한 사람을 보고 촌놈이라 하고, 세정을 모르는, 더욱이 돈을 모르면 바보라 하지 않는가. 이런 고분고분하지 못한 나에게 방송출연 기회가 줄어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거의 1년, 또 2년간 TV 출연을 하지 못한 채 지낸 적이 있다. 이런 바보 같은 고집쟁이가 답답했던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아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소정옷집’이라는 이름으로 양장점을 차려 무려 20년이란 긴 세월을 운영했다. 나는 그저 바깥일만 좀 거들 뿐이다. 정말 무능한 가장이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요즘 젊은 배우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우리 젊은 시절엔 ‘장래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면 자신의 스튜디오를 갖고 싶다는 말을 하는 이가 꽤 있었다. 나도 그랬다. 여유가 있는 이는 작으나마 극장을 운영하는 배우도 있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그동안 무대에서 체험한 연기술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싶어 ‘송백당’이라는 이름의 스튜디오를 개설하고 적은 인원과 일대일의 무료 연극교육을 했다. 그러나 결국 운영비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3년 만에 문을 닫아야 했을 때 눈시울이 뻐근했다. 이럴 때 돈이 필요한 것이구나 싶었다. 지속성이 없던 젊은 시절, 눈에 아른거리는 어느 여인에게 말 한마디 못 건넨 일, 어려서 꿈꾸던 선생님, 공무원이 되어 나라에 봉사하고 싶었던 일, 이런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후회를 하랴?

나는 요즘 ‘송백당’ 스튜디오를 다시 열 생각을 하면서 희망에 부풀어 산다.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아직도 철이 덜 들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