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12) 한경희 - 너무 늦어버린… 사랑합니다

 

한경희 |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1986년 겨울 나는 잿빛이 가득한 스위스 하늘 아래 있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사무국에 취업했고, 기대에 부풀어 한국을 떠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IOC 업무는 생각보다 무료했다. 동료들은 작은 체구의 동양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장밋빛일 줄 알았던 스위스의 겨울은 생각보다 춥고 음산했으며 외로웠다.

그때 내 품에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아버지가 생애 처음으로 보낸 편지였다. 낯간지러운 미사여구 없이, 단지 ‘사랑한다’란 한마디만 적혀있는 편지였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 속의 한마디는 백마디 말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는 내게 있어 넘어야 할 산과 같은 존재였다. 일평생을 교육자로 지낸 아버지는 대나무처럼 강직한 분이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어릴 때부터 좋아하고, 자라서는 존경했지만 고지식한 원칙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버둥치기도 했다.

내가 당신 뜻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딸인 나에게 아버지는 유독 더 엄하셨다. 밤늦게 책을 보고 있자면 “여자가 공부 잘해야 별 쓸모없다”며 “시집 잘 가서 현모양처가 되면 된다”고 꾸지람을 하셨다.

나는 당신 딸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똑똑한 여자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촛불을 몰래 켜놓고 공부하다 잠이 들어 집에 불을 낼 뻔한 적도 있었다. 그날 아버지에게 혼났던 기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더욱 커졌다. 어른이 됐다는 생각에 자유에 대한 갈망도 커져 결국 나는 외국인 여자친구와 어학공부를 하겠다며 학교 근처에서 방을 얻어 생활했다. 하지만 나는 한 달도 못 가 아버지에 의해 집으로 끌려왔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5급 공무원직을 팽개치고 36살에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아버지는 강하게 반대하셨다. 반대를 물리치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성공은커녕 10억원에 가까운 돈만 쏟아붓고 제품은 팔리지 않던 힘든 시간이 계속됐다. 그때 아버지가 내밀던 집문서와 “믿는다”는 한마디는 지금도 평생 잊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렇게 묵묵히 딸을 응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기 직전인 2003년 5월 세상을 떠났다. 당신 딸이 성공하고 당당히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당신을 원망하고 이기려고만 했던 딸의 모습만 기억하고 떠나신 것이다.

돌이켜보면 엄하고 무뚝뚝했던 아버지였지만 내가 약해졌을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과 “믿는다”는 말로 다독여주셨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약해졌을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건넨 적이 없었다.

자식의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조차 깨닫지 못했다. 아버지는 늘 단단한 그 모습 그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내 사업에 바빠, 내 인생에 바빠 정신없이 뛰어만 다녔던 것이다.

자식이 봉양하려 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이 진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버지 생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홀로 계신 어머니와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 딸이지만 어머니는 사랑한다 말 한마디에 함박웃음을 짓는다. 주름진 손을 잡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짧은 시간이 부모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행복이라는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을 닮고 싶었고 어느새 당신을 닮아버린 딸은 정말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