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13) 박동규 - 한마디 말 때문에

박동규 | 서울대 명예교수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김장철이어서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버스 정거장 세 곳을 지나야 있는 시장에 갔다. 시장 입구에 배추들이 마치 무덤처럼 산같이 차곡차곡 열을 지어 쌓여있고 무 들도 길 양편에 내 키 높이보다 높게 벽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배추 값을 물어보기도 하고 때로는 배추포기를 들어 속을 살피기도 했다. 김장시장을 한 바퀴 다 돌아다녀 봤지만 어머니는 어떤 것을 사겠다는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해 질 무렵이라 가마니를 펴서 이불처럼 배추를 덮는 이도 있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머니는 두 시간 넘게 김장시장을 돌다가 내 손을 잡으며 그냥 가야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나는 빈손으로 버스정거장 세 곳을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다시 시장으로 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김장시장을 돌았다. 그리고 어두워서야 맨 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일찍 집으로 왔고 어머니는 다시 나를 데리고 김장시장으로 갔다. 이날은 어머니가 어느 배추장수 아저씨와 오랫동안 흥정을 하다가 어머니와 떨어져 모닥불 곁에 서 있는 나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어머니는 배추장수 아저씨가 내 준 리어커에 신문지를 깔고 배추를 실으라고 했다. 백 포기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가서 무를 사서 리어커에 실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리어커를 김장시장 한 구석에 세워두고 기다리라고 했다. 시장 한 구석에 리어커를 세우고 한참을 기다려도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답답해서 리어커를 두고 시장 길을 따라 살살 걸어가며 어머니를 찾았다.

얼마가지 않아 어머니가 길바닥에 앉아 남이 버리고 간 배춧잎과 무청을 골라 모아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에게 다가가자 어머니는 리어커를 끌고 오라고 했다. 리어커를 끌고 오자 어머니는 이 쓰레기 같은 배추껍질과 무청을 리어커에 실었다. 그리고 내가 앞에서 끌고 어머니가 뒤에서 밀며 버스 정거장 세 곳을 지나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하여 리어커에 싣고 온 배추와 무를 현관마루에다 내려놓고 나서 나는 부엌에 가서 손을 씻었다. 어머니는 오늘 내가 힘들게 리어커를 끌며 열심히 일한 것을 칭찬해 주었다.

배추시래기를 널어 둔 모습 경향신문자료사진

 
그날 저녁시간 온 가족이 밥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무심코 “엄마, 시장 바닥에 남이 버리고 간 쓰레기 같은 배추 잎사귀는 왜 주워왔어 거지같이”하고 말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이 놈아 배춧잎을 새끼로 엮어 그늘에 말리면 시래기를 만들 수 있고 그것으로 시래기 국을 끓여 먹으려고 했지”하였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수저를 놓고 방을 나갔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 때문에 내 방으로 갔다. 그날 밤이 깊어 나는 목이 말라 내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가고 있을 때였다. 안방에서 아버지가 “다음에는 시래기를 그냥 사다 먹읍시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내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나는 도시락을 가지러 부엌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부뚜막에 앉아 울고 있었다. “배추 잎사귀는 쓰레기 아닌데”하면서 나를 보았다. 나는 어머니의 눈물로 붉어진 눈과 마주했다. 그해 겨울 시래기 국을 먹지 않았다. 배추 한포기 사려고 추운 길을 며칠씩 걸어 다니며 골라야 했던 가난한 살림에 다섯 형제를 먹여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나는 “거지같이”라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은 것이 부끄러워 시래기 국을 먹을 수 없었다. 

하찮은 어린 날의 실언을 지금도 가슴에 상처로 안고 있는 것은 감히 가장 후회되는 것을 고백할 수 없는 부끄러움 때문이지만 작은 말 한 마디가 돌아가신 어머니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아직도 세면대 앞 거울을 보면서 “엄마”하고 소리치는 나 자신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