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15) 신헌철 - 무모한 3수, 해병대 34개월

신헌철 | SK미소금융재단 이사장

절기가 상강(霜降)을 지났다. 가을걷이 끝난 빈 밭에 무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성황당 감나무 끝에 매달린 붉은 홍시 몇 알을 두고 까막까치 우짖는다. 이때부터는 넉넉하던 가을도 차오르는 즐거움보다 무언가 내려앉는 느낌으로 공허해지고, 괜히 서글픈 느낌이 많아진다. 한 해의 성공보다 실패가 더 두려웠던 사람들에게 가을은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다. 고교나 대학교 졸업반 학생들은 예나 지금이나 상급학교 진학과 취업 준비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게다. 1963년 10월 상업고등학교의 졸업반이었을 때나 1971년 10월 대학 졸업반이었을 때가 꼭 그런 느낌이었다. 
 
고졸 은행원이 되려고 상업고등학교에 갔으나 주위에 적절한 멘토가 있을 수 없는 형편에 혼자만의 생각으로 대학 진학을 결심했을 때부터 재수, 삼수까지의 생활은 내 인생의 대표적인 실패로 늘 기억되고 있다. 

정확한 내 실력도 모르고 단순히 학교 성적 하나만으로 최고 대학에 응시했다가 잃어버린 2년 세월이 얼마나 귀한 시간이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은 삼수 끝에 들어간 지방대학의 늦깎이 1학년이었을 때다.

이미 은행에 입사해 3년차 사회인이 된 고교 동기들을 부러워하며 잃어버린 2년을 만회하는 길은 복무기간이 짧은 해병대를 거쳐 빨리 복학하는 길뿐이라고 혼자 결심했다.

육군(28개월), 해·공군(30개월)보다 해병대(24개월)에서 복무하고 휴학-입대-제대-복학의 바통 터치만 잘되면 최대 1년을 벌 수 있다는 내 계산이 틀어질 수 있음을 눈치채기에는 너무 어렸다. 대학에 복학할 1968년 8월 제대만을 학수고대하며 해병대 179기로 입대했다. 

하지만 1968년 1월21일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사건, 7월 실미도 사건, 연이은 10월의 무장공비 울진·삼척 침투사건 등으로 24개월 복무는 34개월로 연장됐고, 결국 1969년 3월말에야 학교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잃어버린 세월을 찾기는커녕 되레 1년이 더 늘어 ‘늙은’ 대학 1학년 복학생으로 바뀌었다.

실패의 나락은 끝없는 내리막길이었고 홀어머니를 뵐 용기도 없었다. 자연히 학교 도서관 외에는 갈 곳도 없었다. 찾아 어울릴 친구도 별로 없었다. 함께 의논할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던 환경이 ‘가보지 않은 길’에서 얼마나 많이 헤매게 했는지 모른다. 
 
훗날, 할 수만 있다면 힘든 사람의 네트워크가 되어 주려고 애쓴 것도, 젊은이들에게 많은 사람과의 관계성을 강조한 것도 그런 기억 때문이다.

어쨌든 운명은 그렇게 도서관에서 남아 공부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환경으로 나를 몰아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연속된 불운과 실패가 결국 희망의 끝자락이라도 붙잡도록 인도해 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언제부터인가 성공과 실패는 한집에 붙어있는 방이며, 우리는 큰방(성공)과 건넌방(실패)을 오가며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옛날에 어머니께서 가끔 하신 말씀 중 “동지가 지나서 열흘이면 70살 먹은 노인도 하루에 10리는 더 걸어간다”란 말씀이 지금도 생각난다. 동지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다. 하지만 이때부터 캄캄한 겨울밤이 시작되고, 긴 밤을 괴롭게 지새울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러나 “밤이 깊으면 새벽이 이미 와 있다”는 말처럼, 밤이 가장 깊은 동지가 지나면 이미 낮의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했음이 세상의 이치임을 알아야 한다. 내 인생의 캄캄한 동짓날이 대학 3수와 해병대 근무 34개월이었다면, 늙은 대학생이 되어 몇 년 동안 처박힌 도서관 생활은 뒤이어 찾아올 입춘의 길목이었다.

가장 후회스러운 자신의 결정과 그 결과가 냉혹하게 엄습하더라도 후회에만 머물지 말고 새 길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새 길에서마저 암울함을 느껴도 절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바로 거기가 실패와 후회의 종착역이면서 희망과 성공의 출발역임을 믿어야 한다. 

실패와 성공이 한집에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새로운 도전의 시대에 나도 70대의 인생을 열심히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