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16) 박경철 - 아버지의 건강검진

박경철 | 의사·경제평론가

어느 해 추석직전 벌초길에 할아버지 산소에 들렀을 때, 절을 마친 아버지가 “너도 대학생이 되었고 이제 성인이니, 이번 추석에는 네가 주도해서 차례를 한번 지내봐라”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별 다른 뜻 없이 받아들였으나, 이어서 “만약 아버지가 죽으면 네가 장남이니 스스로 차례도 지낼 수 있어야 하는 거다”라고 하시는 바람에 그 순간 불편한 마음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일이라 무심하게 넘어갔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요즘 뒷골이 자주 당기고 가끔 어지러운데 병원이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라고 하셨을 때, 집에 있던 실습용 혈압계로 혈압을 잰 다음, “혈압은 괜찮으신데 너무 무리하시니까 그렇죠. 야근도 잦고”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넘어가고 말았다. 
 
일선 경찰관이었던 아버지는 경비와 잠복근무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이틀 사흘씩 연이어 격무를 하다보면 가끔 그렇게 두통이나 피곤을 호소하시는 경우가 있었고,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병원을 쉽게 찾던 시기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게 아버지는 늘 바위와 같은 분이었다. 세속적으로는 평범한 하급공무원이었지만, 적은 말수 속에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담을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퇴근 후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자리에 눕지 않는 단정한 분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버지들의 뒷모습은 자식들에게 가장 큰 스승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세속적인 성공이나, 자식들에게 물량을 쏟아붓는 것을 헌신으로 여기며 자녀를 교육하고 있지만, 자식이 보고 배우는 것은 아버지의 뒷모습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버지는 여전히 큰 존재인 것이다. 

당시 의대생이었음에도 큰 바위 같은 그런 아버지가 어디가 아프거나 혹은 다른 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2박3일간의 경계 근무 후 하루 주어진 휴일에 성지순례를 떠나다 출발하는 버스 안에서 쓰러지신 것이다. 

                                                                            <경향신문DB> 

뇌 깊숙이 생긴 지주막하 출혈이었다. 지금도 거의 마찬가지지만 당시로서는 수술이나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지켜보아야 했다. 공교롭게 내가 다니던 대학병원의 응급실에 실려온 아버지는 단 한마디의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억장이 무너졌다. 신경외과 주임교수님을 붙들고 어떻게든 수술을 해달라고 애원했지만 불가능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3일간 중환자실에서 보호자로 있는 내내 견딜 수 없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다고 하실 때 병원에 모시고 가지 않은 소홀함을 아무리 후회해도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 내겐 이 일이 일생을 지배하는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아버지가 보낸 신호를 그의 아들이 가벼이 넘긴 것은 설령 의대생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일생의 상처가 될 일이었고, 그 후 한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아무리 후회해도 그것은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3일 만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멀리 모교가 보이는 작은 공동묘지에 모신 후 지금도 산소에 갈 때면 그 일이 생각난다. ‘그때 만약 병원에 모시고 갔더라면 어땠을까?’ 당시 의술로는 어차피 진단이나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변명은 값싼 위로에 불과한 것이다.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안위가 걸린 문제이고,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직업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건강검진을 소홀히 하는 편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쨌건 혼자서 그렇게 아득바득 건강을 챙기는 것이 아직은 썩 내키지는 않는다. 

이렇듯 26년의 세월 동안 매년 아버지 기일이나, 추석이 되면 뼛속 깊이 시리고 아픈 후회가 되살아나지만, 그래도 후회는 한편 반면교사를 낳았는데 그것은 바로 어머니 건강이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세 아이와 함께 세파를 이겨온 어머니를 두 분의 몫으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그나마 앞서의 회한을 조금이라도 만회하는 방법인 셈인데, 돌아보면 자식은 이렇게 부모가 떠나가야 조금씩 철이 드는 법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