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10) 이만기 - 하필 왜 씨름을 했던고

이만기 인제대 교수·씨름인

이 얘기를 들으면 놀랄 사람들이 많겠지만 난 씨름한 것을 후회한다. 혹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다음 생에는 샅바를 잡지 않을 것이다. 

씨름을 통해 난 많은 것을 얻었다. 프로씨름 원년인 1983년, 겨우 대학교 2학년 때 초대 천하장사 자리에 올랐고 이후 10년 가까이 온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한때는 탤런트 현빈만큼이나 인기가 있었고 연예인, 운동선수 통틀어 연간 소득 1위에 오른 적도 있을 만큼 돈도 많이 벌었다. 모두 씨름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경향신문 DB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씨름을 시작한 것을 후회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갔던 특별활동반이 왜 하필 씨름부였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훈련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운동선수, 특히 씨름선수에게 가지는 편견 때문이었다. ‘운동선수는 무식하다’ ‘힘만 쓰는 놈들이 뭘 알겠느냐’는 손가락질은 선수시절이나, 20년째 대학교수를 하고 있는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한때 국회의원을 꿈꾼 적이 있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공천신청을 했고 마산 갑에서 후보로 나설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얼마되지 않아 공천이 번복됐다. 흑색선전 때문이었다. “이만기가 말만 대학교수지 강의할 때 스포츠를 영어로 못 써 S자만 써 놓고 수업을 한다더라”는 말이 내 귀에까지 들어왔다. “씨름인이 국회에 들어가면 안그래도 난장판인데 씨름판 만들 일 있느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나 하나뿐만 아니라 씨름인 전체가 매도됐다.

4년 뒤인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다시 도전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유세하러 지역구 시장에 나갔다가 겪은 일이다. 아는 형님을 만났는데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슬쩍 물었다. “만기야. 듣자하니 니 이름도 한자로 못 쓴다며? 그게 진짜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한자로 내 이름을 써 보여주자니 자존심 상하고, 또 “형님, 그게 말이나 됩니까”하고 그냥 돌아서면 ‘이만기가 진짜로 지 이름을 한자로 못 쓰더라’는 소문이 더 커질 것 같았다. 결국 그 형님에게 한자를 써서 보여주고 곤혹스러운 순간을 벗어났다. 돌아서는데 한숨이 나왔다.
 

<경향신문DB>

나는 어린시절부터 공부를 좋아했다.
씨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까지는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공부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수업이 있는 날에는 소속팀 숙소가 있는 울산에서 마산까지 통학을 해야 했지만 힘든 줄 몰랐다. 

1990년 현역 은퇴를 하자마자 울산대에서 교양체육 강의를 맡아 달라는 제의가 왔다. 당시는 석사학위만 있어도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다. 1991년에는 인제대 사회체육학과 교수로 초빙됐고 2001년 중앙대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세계적인 석학은 못 될지라도 체육학 분야에서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도 세상의 편견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천하장사 이만기, 대학교수 이만기가 아닌 ‘무식한 씨름쟁이 이만기’만 남아있었다.

나를 포함한 운동선수 출신들은 언제 어디서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넘어갈 일도 운동선수가 실수를 저지르면 ‘운동만 하느라 배운 것이 없어서 그런다’는 반응이 나온다. 운동선수 본인뿐만 아니라 그 자식들에게도 마찬가지 편견이 작용한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면 ‘아버지 닮아서 애들이 머리 나쁘다’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난 운동한 것을 후회한다. 그중에서도 ‘힘만 세고 무식해 보이는’ 씨름을 한 것을 후회한다. 이왕 시작한 일이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해 최고 자리에도 올라봤지만, 또 그 편견을 깨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지만, 후회는 어쩔 수 없다. 다만 바람이라면 후배들은, 또 지금 운동선수를 꿈꾸는 아이들은 먼 훗날 나처럼 후회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