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9) 문용린 - 월급봉투와 어머니

문용린 | 서울대 교수·전 교육부 장관 



지내놓고 보니 어머니께 잘못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차로 두 시간이면 닿는 시골에 사시던 어머니를 1년에 고작 두 번 추석과 설날에만 가 뵙곤 했던 것을 후회한다. 멀미로 차를 못 타신다는 것을 핑계로 평생에 한번도, 내 차에 모시고 가까운 온천 한번 안 다녀온 것도 후회한다. 5년 가까이 미국에 유학해 살면서도 어머니를 모셔와 구경 한번 시켜드리겠다는 생각조차 못한 것을 정말로 후회한다.

어머니는 서른에 날 낳으셨다. 위로 12살 차이가 나는 형이, 아래로는 네 명의 동생이 더 있다. 합쳐서 6남매를 모두 잘 키우시고 그 아래 손주까지 다 보시고, 88세 되시던 해 화창한 어느 봄날 새벽에 돌아가셨다.

거친 만주 벌판의 도시 푸순에서 자라, 16살에 우리 아버지와 결혼하신 후, 서른 한 살 되시던 해에 12살짜리 우리 형과 돌이 채 못된 나를 등에 업고 아버지와 함께 선양, 톈진을 거쳐 서해를 건너 1948년 5월 인천 부두에 귀향민으로 도착하신다. 일가친척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남에서 사고무친의 고독감을 느낄 여유도 없이 먹고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셨다.

만주 귀향민에게 생활 전선은 여전히 가혹했다.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공장이 망하고, 살던 집마저 차압을 당해 쫓겨난다. 그 어려운 와중에 나는 초·중·고를 다녔고, 동생들도 태어나 집안은 어느새 대식구가 되었다. 당시 형은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다 병을 얻어 앓고, 나와 내 동생들은 아직 어렸다. 어머니가 양식 걱정하고 학비 걱정하는 한숨 소리를 들으며 나는 학교를 다녔다.
바로 아래 남동생이 중학교 들어갈 때쯤 나는 대학에 다니러 서울로 왔다. 그때부터 나는 ‘남(他人) 같은 식구’였다. 추석과 설날에만 집에 들르는 ‘내놓은 자식’이었다. 방학 중에도 과외 아르바이트로 시간에 쫓기기는 했으나, 핑계에 불과했음을 나 자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난 후 시골집의 살림은 여전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집안을 도와야 하고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학비와 숙식을 해결해야 했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기 때문이지만, 학생이라는 핑계로 집안 살림을 철저히 외면하고 살았던 것을 지금 많이 후회한다.
그 당시에도 어떤 친구는 시골의 동생을 데려다 옆에 두고 공부까지 시키고 있었다. 왜 나는 그 일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었음을 깨닫지 못했을까?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 그리고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 지금도 가득하다.

돌아가시고 2~3년 지난 어느 기일 우리 형제들이 모여 어머니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있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이 ‘엄마가 오빠 이야길 할 때면 항상 미안해하던 일’이 있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미안해 할 일? 내가 잘못한 일이 있을지언정, 어머니가 내게 미안해할 일이라니….

“오빠가 서울서 하숙할 때, 이불 깃 한번도 새로 시쳐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셔서, 오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미안해 하셨어요.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그 얘길 하고 또 하고 하셨거든요.”

운명하시는 어머니 손을 잡고 본 마지막 순간의 어머니 눈빛을 기억한다. 거기에 그런 미안함이 담겨 있었던 것인가…. 나는 희망한다. 그때 어머니가 내 눈빛 속의 미안함과 후회도 읽어 주셨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어머니가 85세가 넘어 기력이 쇠잔해지고, 치매 기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어머니께 고백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제대로 된 봉급을 받고 있었을 때다. 왜 나는 어머니께 월급봉투를 한번도 통째로 가져다 드리지 못했을까? 그것도 4년 내내 말이다. 집안은 많은 동생들과 함께 여전히 어려웠을 텐데도….

60이 가까워 비로소 그게 엄청난 잘못이었음을 깨닫고,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싶었는데, 여전히 철이 제대로 못든 나는 머무적거리기만 하다가, 그만 사과의 기회를 놓쳐버렸다.

“어머니, 그때 참 잘못했습니다.” 이 말을 못한 것이 바로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