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하 | 빙상인
지금도 올림픽만 생각하면 가슴속 진한 아쉬움이 다시 떠오른다.
벌써 35년 전 얘기다. 나는 1976년 이탈리아 마도나 디 캄피그리오에서 열린 세계주니어 스피드스케이팅선수권대회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종합 2위는 미국의 신예 에릭 하이든이었다. 그는 4년 뒤인 1980년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동계올림픽에서 5관왕에 오르며 올림픽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어쨌든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1500m를 제외한 500m와 1000m, 5000m, 1만m 모두 하이든을 이겼으니 체육계에서 내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에서 내가 금메달은 아니더라도 한국 체육 사상 첫번째 동계올림픽 메달을 거머쥘 것으로 예상했다.
1979년 노르웨이 오슬로 세계선수권대회 500m에서 동메달을 따고 내 자신도 올림픽 메달 욕심을 냈다. 더구나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 일주일 전 열린 프레올림픽에서 38초57을 기록했다. 비슷한 기간 다른 대회에 참가한 하이든보다 0.2초나 빨랐다. 가슴이 쿵쾅 뛰었다.
하지만 나의 올림픽 메달 꿈은 불의의 사고로 산산조각이 났다. 500m 결승에 앞서 연습을 하다 코가 주저앉는 부상을 당했다.
메인 링크 안쪽 연습용 링크에서 컨디션 조절을 위해 스케이팅을 하던 난 한국 여자 선수들이 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바깥쪽 메인 링크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메인 링크 스타트라인엔 결승을 앞둔 선수들이 마음대로 연습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불운하게 내 코는 그 바리케이드와 충돌했다.
응급 조치 뒤 경기에 나섰지만 아픈 코 때문에 스피드를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결과는 39초33. 전체 19위. 하이든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기뻐할 때 난 눈물만 쏟아냈다.
참담했다. 처음엔 불운 탓만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핑계였다. 성적이 잘 나오면서 생긴 자만심이 숨은 원인이었다. 결승을 앞두고 냉정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런 아쉬움을 갖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로는 못했지만 지도자로는 꼭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만들어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뛰어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1992년 프랑스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감독을 맡았다. 그때 19살짜리 한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대회 남자 1000m에서 은메달을 거머쥔 김윤만이었다.
알베르빌로 가기 전엔 김윤만이 메달을 딸 거라고 생각도 안 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빙상인들이 그렇게 봤다. 과감한 성격에 재능이 탁월해서 장래성은 충분하다는 판단 정도였다. 그런데 그가 한국 체육 사상 최초로 동계올림픽 메달을 목에 거는 이변을 일으켰다.
김윤만이 2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뒤 다들 내게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난 전혀 기쁘지 않았다. 김윤만의 기록이 1분14초86. 1위를 차지한 독일 올라프 진케의 1분14초85에 불과 0.01초 뒤졌다. 0.1초 아니 0.05초만 뒤졌어도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0.01초 차로 2위가 되다보니 서운한 마음뿐이었다.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내 몸에도 변화가 왔다. 그날 배가 아파 계속 고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은메달도 대단한 성과지만 좀 더 세심하게 지도하고 신경을 썼다면 금메달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나 레이크플래시드 올림픽과 알베르빌 올림픽을 떠올려보면 내 자신에게 아쉬운 점이 훨씬 많았다. 지난해 밴쿠버 올림픽에서 우리 후배들이 스피드스케이팅에서만 3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후배들의 쾌거에 눈물이 났다.
이제 2018년엔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이 개최된다. 35년 전 사이즈도 맞지 않는 네덜란드제 스케이트화를, 그것도 대회 직전 처음 신고 뛸 만큼 힘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후배들이 평창에서 밴쿠버 이상의 신화를 일궈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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