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미배의 Music Story

[Concert Review]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

새해 연휴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첫 날, 링컨센터 도서관에 가던 길에 잠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공연장으로 향하고 있는 아이들과 부모 관객들의 인파가 메트 오페라 극장 앞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였다. 연휴 바로 다음 날 아침부터 무슨 공연이 있어서 그런고 했더니, 바로 아이들을 위해 제작된 축소 영어 버전 오페라 <마술 피리 (The Magic Flute)>(모차르트 작곡)의 공연이 11시부터 있단다.
뮤지컬 <라이온 킹>의 무대 감독이 연출했다 하여 더욱 유명하기도 한 이 공연에 오래 전부터 관심은 있었으나, 그 동안 시간을 내지 못했고, 이날 막상 공연을 볼 수 있을지 기웃거려보니, 역시나 모든 표는 매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에, 오페라 마니아들인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로 물어봤더니, 두 버전 (축소된 영어 버전과 독일어 풀 버전) 모두 공연 자체는 재미있는데, 기왕이면 축소된 영어 버전을 보지 말고 독일어로 된 풀 버전 <마술피리 (Die Zauberflote)>를 보라는 조언들을 해주었다. 그래서 일단 가볍게 이 공연에 대한 미련을 접었다. (메트 오페라 시즌에 뉴욕에 방문하시는 분들은 <마술피리>를 찾아보시길)


뭔가를 놓친 아쉬운 마음에 다른 공연 일정을 보니, 이날 저녁에는 또 다른 오페라의 공연이 있는데, <마술피리>에 못지 않은 올 해의 문제작 <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 (영어 제목은 The Girl of the Golden West)였다. 오페라의 대가 푸치니의 작품으로, 사실 한국에서는 제목도 들어보지 못했었고, 미국에서도 드물게 연주가 되고 있는 오페라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아래의 장면 사진이 나의 전공 논문자격시험 기출문제 목록에 껴 있었기에 수년 전에 따로 공부를 해야했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세계 초연 100주년을 맞아서, 이번 시즌에 새로운 공연으로 야심차게 준비되었고, 지난 12월에는 이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뿐 만 아니라 뉴욕 시 안의 몇몇 곳과 보스턴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사진은 이 오페라의 마지막 장면으로, 100년 전 이루어진 이 오페라의 초연 무대를 담아내고 있다. 가운데 로프에 목 매달려 처형되기 직전인 남자가 딕 존슨 (초연때 이 역할을 맡은 성악가가 바로 카루소. 그렇다. 보첼리와 파바로티의 연주로 유명한 노래 '카루소'의 주인공, 카루소다.) 그의 옆에 로프를 잡고 있는 여성의 이름은 미니, 그리고 우측 전면에서 딕 존슨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이 보안관 잭 랜스

 


이 공연 또한 표를 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공연 당일에만 판매하는 러쉬 티켓을 사기 위해서는 5시간 가량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다시금 오페라 매니아 친구들의 의견들을 모았다. 이렇게 줄을 서서 어렵게 티켓을 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공연인지. 친구들의 반응은...'그럴 가치가 있다'였다. 이번을 놓치고 나면 다시금 실제 공연을 보게 되기 어려울 것이고, 음악이며 무대 연출이 잘 된 좋은 공연이라는 평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국은 티켓을 구했고, 매우 좋은 자리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아쉽게도 이날, 여주인공 미니 역을 맡은 데보라 보익트(Deborah Voigt)가 아파서 대역 성악가가 등장했다. 금발의 푸른 눈에 체형까지 보익트와 상당히 비슷했는데, 역시나 갑작스레 무대에 오르게 되어서 였는지 전반부에는 목소리가 다소 약했다. 후반부로 가면서는 훨씬 좋아졌지만...
여 주인공 성악가의 교체는 이 오페라에서 특히나 큰 의미를 갖는다. 왜냐면, 미니의 집을 돌보는 인디언 도우미를 제외하고는, 미니가 오페라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여성 배역의 노래가 한 성악가에게 집중이 되어 있으니, 데보라 보익트 정도의 대가가 아니고서는 배역을 소화해 내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녀가 아파서 못 나온다니....!

공연의 측면에서 제일 눈에 띄는 점은, 2막에 동물 '말'이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음악 이외에 세트나 무대 의상 만으로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데에 한계가 있는 내용이기도 하지만, 2막 자체가 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 위주로만 느리게 진행이 되어 덜 극적인 느낌이었는데, 이 단조로움을 해결하는 장치로 실제 동물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냥 말이 등장인물들을 태우고 무대 위로 등장한 후, 등장인물들을 내려놓고는 바로 무대 뒤로 퇴장을 했지만, 어쨌건 무대 위에 실제 동물이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이목을 끌기 좋았고, 화려함이나 볼거리 제공이 너무나 중요한 (그래서 부르조아 예술 아니냐고 비판받기도 하는) 오페라의 일면을 느껴볼 수 있었다. 영상광고에서 이야기하는 3B법칙(Beauty, Beast, Baby를 등장시켜야 성공한다는)이 영상광고에서만 통하는 법칙은 아닌 듯 하다.

 


말을 데려오고,? 무대 위로 올리는 과정이 담긴 영상물


음악적인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푸치니의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푸치니의 음악에 매료될만 한 기회였다. <나비부인>, <토스카>, <라 보엠> 등 그의 대표작들을 많이 접해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화성적으로도 풍부하고, 오케스트레이션도 아름답고, 전체 오페라가 음악적으로 잘 짜여졌다는 느낌을 받지 못해 왔는데, 이 오페라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특히나 이곳 저곳에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등장하는 몇몇 선율들이 느껴졌는데, '설마 웨버가 푸치니에게서 그 부분을 가져왔을까?' 의심이 많이 들었다. 나중에 이번엔 오페라/뮤지컬 매니아 친구에게 물어보니, 웨버가 푸치니에게서 '훔쳐온 것'이 분명하고, 이 오페라가 아주 드물게 연주되어왔기 때문에, 자신(웨버)이 이 선율을 가져다 써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다고 한다. (푸치니에게서 가져왔단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어떤 오페라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고.) <오페라의 유령> 때문에 웨버의 음악도 꽤 좋아해 왔는데, 다소 실망했다.-.-

역시나 요즘의 영화나 TV 드라마, 혹은 가수들의 쇼무대나, 뮤지컬 같은 다른 매체들에 익숙해져 있다보니, 극적인 전개는 느리게 느껴지고, 성악가들의 비주얼에도 불만이 생기고 (이쁘고도 노래 잘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 듯...), 160년 전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다 보니, 현대의 눈으로 봐서는 공감하지 못하고 웃을 수 밖에 없는 대사들이 많았다. 이야기 전개상으로는 굉장히 진지한 대목인데, 자막으로 대사를 보는 관객들이 '키득키득' 거리는 소리들이 여기 저기에서 들려왔다. 그렇다고 이제사 대본을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서 오페라가 현대에 살아남기가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 끝에 무대 인사를 하고 있는 지휘자 니콜라 루이조티(Nicola Luisotti)


오페라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미니의 설득 장면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범죄자인 연인을 살리기 위해, 처형 직전, 미니는 자신이 이 시대, 이 광산에서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를 강조한다.
'이 척박한 광산에서 당신네들의 친구이자 연인이자 여자형제로서 너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자신의 젊은 시간을 바쳤고, 이제 사랑하는 이를 만나 함께 하고자 하는데, 너희들이 이리도 안 도와주고 이 남자를 죽여야 직성이 풀리겠냐'는 이야기인데, 이런 설득이 먹혔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까칠한 탓일까.
내가 과거에 좋은 일 많이 했으니, 이번엔 이 남자의 죄를 눈 감아 달라는 논리가 너무나 쉽게 설득을 이끌어내어 좀 허무하기까지. (사실 2막의 카드 게임에서 미니가 술수를 써서 승리하는 플롯도 너무나 허술하다.) 그래도 '좋은 일'을 많이 했으니, 용서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겠지. 과거에 '나쁜 일'을 많이 했다면, 이제사 '착한 일'을 한다 해도 의심이나 받았을 터.  

결국 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오페라는 굉장히 특이한 오페라다. 전체 오페라에서 여자 주인공이 오직 한 명이고, 이 강인한 서부의 아가씨가 사랑에 빠지게 되자, 궁지에 몰린 연인을 첫 번째는 속임수로, 두 번째는 진심이 담긴 설득으로 구해낸다. 이야기의 흐름은 모두 이 여자 주인공의 행동에 달려 있다. 다른 오페라에 등장하는 어떤 여성 주인공과도 다른 강인한 캐릭터. 그래서 <서부의 아가씨>가 이 오페라의 제목일 수 밖에 없었나 보다.
이 오페라의 100주년 기념 홈페이지가 있다. http://www.fanciulla100.org/
우리나라에서도 이 오페라가 공연될 가능성이 있을까? 다시금 공연을 보게 될 날이 있을까 싶지만, 음악만이라도 꼭 다시 들어보고 싶은 오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