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미배의 Music Story

[Music Story] 죽은 동물들을 위한 음악

가까이 지내는 일본 친구의 고양이 코코추가 지난 주에 죽었다. 한 두 달 전부터, 코코추가 음식을 잘 안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는데, 그게 일종의 노환 증세였었나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주변에 고양이 키우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고양이의 수명이 20년이 채 안 된다고. 코코추의 나이는 17세였다.

그 친구가 그 고양이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상실감이 어떨지 짐작이 가기는 했지만, 사실 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난감했다. 머리로 이해는 하지만, 완전히 공감할 수 없기에, 괜히 무슨 말을 했다가 섯부른 위로가 되지나 않을지 조심스러웠다.

이 친구는 일본에서의 한 설문조사 이야기를 했다. 원래 일본의 전통을 따르자면 사람이 죽은 후, 가족들이 한 묘에 묻히게 되지만, 현재, 일본 사람들의 많은 수가 가족보다는 자신들의 애완동물과 함께 묻히기를 바라고 있다는 결과가 나와있다고 했다. 자신도 그러고 싶다고. 그렇게 영원히 코코추와 함께 하고 싶다고.
실제로, 일본에 계신 그 친구의 양아버지 또한 애완견을 아끼셔서, 가족들이 다니는 절의 스님께 애완동물과 함께 묻힐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여쭈어보았는데, 그럴 수는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스님께 상담을 할 정도라니, 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그 소원(?)이 그냥 무시할 만 한 사안이 아니란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애완동물의 죽음이 주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그린 음악하면 떠오르는 NexT의 <날아라 병아리>

 

함께는 묻힐 수 없다고 하니, 그럼, 코코추를 먼저 떠나보내는 길에 (화장하는 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어떤 것이 있을지를 그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그 친구의 양아버지가 일본 스님께 대답을 들었듯, 불교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삶에 구별을 두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나마도 동물 또한 영혼을 지닌 존재로 귀하게 바라보는 종교가 불교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 불교식으로 염불(chanting)을 해주면 자신의 코코추가 그 소리를 듣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이런 대화 끝에,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 혹은 이제는 생과 사의 길을 갈라선 어떤 존재와 소통하려 할 때, '음악' 혹은 '소리'만큼 유용한 수단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한 스님께 말씀 들었던 '범음(梵音)의 세계'가 떠올랐다. 인간, 동물, 산 자, 죽은 자 등의 다양한 존재들이 모두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뛰어넘는 세계에서는 '소리'가 소통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불교에서는 염불이 그런 매체일 거고, 다른 종교에서도 분명 다른 방식의 '소리내기' 방식이 있을 것 같다. 무속에서의 '굿'도 소리를 통한 매개가 있는 것이고, 서양 클래식 음악에서도 죽은자를 위한 음악으로 레퀴엠(진혼곡)이 있다.

거창하게 염불, 진혼곡 까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생각해보니 죽은 애완동물들을 위한 음악들이 참 여러가지가 떠올랐다. 죽은 영혼을 달래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죽음의 안타까움, 슬픔을 담아내고 있는 음악들, 그들과 함께 했던 시간의 기록으로서의 음악...



어린 시절 함께 했던 개에 대한 회상, 양희은의 <백구>


 



또 다른 개에 대한 추억, 마이클 잭슨의 <Ben>


이렇게 노래로 애완동물과의 추억을 아름답게 되새기는 가수들이 있는가 하면, 가사가 없는 기악음악으로 애완동물을 추억한 음악가도 있었다. 언어(가사, 말)를 뛰어 넘어, 소리 만으로 그 존재를 표현하고, 추억해보고, 그 존재가 영원히 기억되도록 만든 음악--탱고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Astor Piazolla)의 작품 <무무키(Mumuki)>가 바로 그런 곡이다. '무무키'는 피아졸라 부인의 이름이기도 하고, 피아졸라가 그의 개(Flora)를 부르던 애칭이기도 하단다.


 



피아졸라가 직접 반도네온을 맡아 연주하는 <무무키>


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마치 장례 의식이 벌어졌다가 마무리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실제로 이 곡이 작곡되었던 시기가 그의 개 무무키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고. 마치 장례식에 문상 온 조문객들처럼 악기들이 서서히 등장을 하고, 피아졸라는 무무키와의 기억을 (반도네온으로) 되살려낸다. 빠른 템포의 가운데 부분은 그런대로, 후반으로 가는 느린 템포의 부분은 또 그런 대로, 무무키와 함께 했던 행복했던 여러 순간들에 대한, (이제는 과거의 일이기에) 슬픈 회상들을 담아낸다.
이렇게 멋진 음악으로 기억되다니, '개팔자가 상팔자'란 말이 시니컬하게 떠오르지만, 그들의 동물을 추억해볼 수 있는, 그 동물들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는 어떤 방식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것이 애완동물을 키웠던 사람들의 마음인 듯 하다.

 

한편, 이렇게 음악으로나마 기억될 수 있는 '복받은' 동물들을 떠올리다보니, 반대로 버려진 동물들(반려동물들) 그리고 더 크게는 구제역으로 살처분 되고 있다는 돼지, 소들의 안타까운 소식까지 떠오른다. 이 동물들에게는 그야말로 진혼의 굿판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동물들이, 사랑받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온전히 생명이라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이리 어려운 일이라니...   
 
아래는 뉴욕의 한 버스 정거장에 붙어있는 포스터. 반려동물을 입양하자는 취지의 포스터이다.
난 동물애호가도, 동물보호 운동가도 아니지만, 인간들의 잘못 때문에 힘없는 다른 생명들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