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미배의 Music Story

[Concert Review] 작곡가 진은숙, 탈레아 앙상블 뉴욕 공연: Unsuk Chin Portrait Concert

작곡가 진은숙의 소규모 앙상블 작품들로만 구성된 연주회가 2월 16일 뉴욕 보헤미안 내셔널 홀에서 있었다. 진은숙은 현재 세계 무대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대음악 작곡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곡가의 주요 활동무대가 유럽이어서인지, 미국에서는 그 이름이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미국의 음악가들에게 "Unsuk Chin"을 아냐고 물으면 대부분 갸우뚱 하거나,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름만 들어봤다는 정도. 그러나, 이 분이 2004년 그라베마이어 수상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거나, 음악을 들어본 후의 반응은 확실히 달라진다. 

 
그녀가 유럽보다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유를 꼽는다면, 앞서 이야기했듯 미국이 그녀의 베이스캠프가 아니어서이기도 하지만,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들이 많이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이들의 음악이 활발하게 연주되다 보니, 유럽에서 활동하는 (동양) 작곡가의 작품을 올리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미국에서 그녀의 작품이 연주되는 음악회를 접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2008년의 몬트리올 심포니의 '로카나' 카네기홀 연주, 그리고 지난 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첼로 협주곡' 세계 초연 등의 굵직한 연주를 통해 이제 미국에서도 그녀의 입지를 확인시키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뉴욕에서 '진은숙의 작품들로만' 짜여진 음악회가 열리게 되었다. 게다가 연주된 네 곡 가운데 세 곡은 뉴욕 초연이었다. 이번 공연의 프로그램은 현대음악 연주단체인 '탈레아 앙상블'에 의해 짜여졌고, 뉴욕 한국 문화원에 의해 후원되었다.
탈레아 앙상블 악단의 크기에 맞게, 소규모의 앙상블 작품들로만 프로그램이 구성되었다. 그라베마이어상 수상작인 바이올린 콘체르토, 그리고 <로카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의 대편성 작품이 그녀의 대표작들로 알려져있는 가운데, 쉽게 접하기 힘든 소규모 작품들만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작품들은 소규모 편성이라는 면에서 연결고리를 갖기도 하지만, 대부분 1990년대에 작곡되어 2000년대에 수정을 거친 작품들이다. 그래서, 이번 연주는 대규모 작품으로 명성을 얻기 이전에 이 작곡가는 어떤 작품들을 썼던 것인지를 보여준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탈레아 앙상블>

 

<공연이 열린 보헤미안 내셔널 홀 입구>


연주된 작품은 <Allegro ma non troppo>, <ParaMetaString>, <Piano Etudes> 가운데 II, IV, V, VI번, 그리고 <Fantaisie Mecanique>였다.
첫 두 작품은 테입에 녹음된 음원들 위에 악기 연주가 덧붙여지는 아이디어로 구성된 작품이었다. 첫 작품 <Allegro ma non troppo>은 타악기 독주자가 종이장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테입에 녹음된 우리 주변의 생활 소음들이 위에 자연스레 다양한 타악기의 소리들을 얹어 새로운 소리의 세계로 청중을 이끌었다. 녹음된 소음들의 바탕으로, 우리가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는 우리 삶 속의 숨겨진 소리들을 음악적으로 재배치하는 작업이었다. 테입에 녹음된 음원의 사용, 소음의 활용이라는 점에서는 셰퍼나 케이지 같은 과거의 현대음악가들을 떠올리게 되긴 했지만, 테입에 녹음된 음원은 스피커로 흘러나오고 거기에 실제 연주가 함께 얹어지게 되면서 만들어지는 음악적인 내용은 진은숙 만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ParaMetaString> 역시, 테입에 미리 녹음된 현악기 소리들을 각 악장마다 하나의 화두로 삼아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그 소리를 중심으로 네 명의 현악기 주자들이 다채로운 소리의 탐험을 보여주었다.

  

<공연 시작 전 객석 풍경>


앞의 두 음악이 다소 전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은숙의 명성만 듣고 음악회장을 찾은 현대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청중들에게 전반부 프로그램은 다소 어렵게 들리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 비해 피아노 독주곡, <Piano Etudes>는 일단 시각적, 청각적으로 청중들을 사로잡는 데에 가장 용이했던 레퍼토리였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진은숙의 음악이,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소리(음향) 자체로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퀄리티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런 특성은 대편성 작품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날 연주된 곡들 가운데에서는 이 피아노 곡에서 그런 생각을 가장 잘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일본 출신 피아니스트 타카 키가와가 게스트 독주자로 이 작품을 연주했는데, 연주에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연주가 더 좋았다면 작품도 훨씬 더 멋있게 들렸을 거라 본다.         

마지막 곡 <Fantaisie Mecanique>는 여러 타악기, 트럼펫, 트럼본, 피아노를 위해 구성된, 이날 연주된 곡 가운데에는 가장 대편성의 곡이었다. 제목이 <Fantasie Mecanique>라니 참 아이러니컬하다 생각했는데 ('기계적인 환상곡? 환상은 자유로워야 하는 거 아닌가? 환상이 기계적으로 펼쳐진다고?'), 역시나 작곡가는 위대한 존재였다. 이 아이러니컬한 아이디어를 음악으로 펼쳐놓다니...작품을 밀고가는 음악적인 틀을 구성해 놓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환상이 다양한 악기들로 드러나게 만들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어느 한 음도 그냥 대충 얹어지지 않았고, 그냥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 숙고와 그에 바탕을 둔 참신한 아이디어가 함께 빛을 내는 작품을 듣고 있다보니, 자신만의 색깔을 만들어내기까지 작곡가가 얼마나 심각하게, 치열하게 고민하며 곡을 썼을지가 느껴지는 듯 했다.

<연주 후 지휘자의 요청에 따라 전면으로 나와 연주자들과 함께 객석에 인사하고 있는 진은숙 작곡가>

(사진이 좀 흐릿합니다요.^^)


세계적인 작곡가로 인정받을 만 한 자신만의 세계를 이루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마 나를 포함, 보통의 사람들은 상상을 하기 힘든 일일 게다. 음악회의 중간에 <탈레아 앙상블> 소속의 앤소니 층(Anthony Cheung) 박사와 진은숙 작곡가와의 토론이 있었다. 어떻게 작곡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스승 리게티에게서 배울 때 어땠었는지, 이 소규모 작품들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등 흥미롭고 다양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기억에 남는 대답은, 리게티에게서 배우던 시절이 진은숙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단 것. 리게티가 너무나 비판적인 스승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가장 많은 것을 배우고 작곡가로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시기였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협주곡, 관현악곡, 오페라 등의 대규모 작품들을 쓰고 있는데, 이날 연주된 소규모 작품들을 쓸 때와 최근에 어떤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작곡가는 나이가 들수록 (음악적으로) 보수적이고 낭만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고 했다.(언젠가 이 단어들 뒤에 놓인 깊은 의미들에 대해 후대 학자들의 코멘터리가 붙게 되리라 본다.)
덧붙여, 대규모 작품들 속에서 아직도 "searching for a new harmony" (새로운 하모니를 찾고 있다)라는 마지막 말에서, 작곡가로서의 확고한 사명감이 느껴졌다.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오랜 여정길에 만들어졌던 앙상블 작품들의 연주회. 이 연주회에는 "PORTRAIT CONCERT"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초상화(portrait)가 의미하듯,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얼굴을 걸고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곡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많은 생각을 남겨준 의미있는 공연이었다.



<Youtube에 올라와 있는 진은숙의 피아노 연습곡 V. 토카타. 이날 공연에서 연주된 피아노 곡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