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미배의 Music Story

[New York Music Guide] 뉴욕의 클래식 라디오 채널 1: WQXR

예전에 한 선배로부터 들은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있다. 한 음대생이 독일로 유학을 갔는데, 자신은 일일히 연습하고 공부해서 수년간 '습득한' 클래식 레퍼토리가 그 곳에서는 아주 어린 아이들도 흥얼거리는, 현지인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음악이었다는 데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래도 클래식 음악의 뿌리가 서양에 있으니 그럴 것이라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내가 뉴욕에 살아보니, 아무리 서양에 살아도 서양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과 더 친숙할 것이라는 가정이 반드시 유효한 것은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세계 어디서나, 특별한 관심이 없으면 클래식 음악과 전혀 상관없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시대인 듯 하다. 클래식 음악회에 가 봐도 한 눈에 흰 머리 청중들이 객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 클래식이 이곳에서도 젊은 청중들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인상까지 받게 된다.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되는, '클래식 음악청중의 저변'이란 것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인터미션 때, 공연장의 화장실에서, 혹은 다른 객석에서 사람들이 '졸렵다'라는 말 대신에, 연주된 음악에서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고 왜 저런 연주가 의미가 있는지, 혹은 그 작품이 뭐가 특이한 지 짚어내는 대화들을 엿듣게 될 때이다.
그냥 동네 할머니 같은 행색의 아주머니들 사이에도, 듣고 있는 음악에 대한 자신들만의 의견이 (너무나 사소할지라도) 분명하고 간결하게 표현이 된다. 나는 책으로 배운 사실이 그들에게는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무언가'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무엇이 이런 보통의 사람들이 음악에 관한 수다를 떨며 음악을 향유할 수 있게 하는 걸까? 음악회에 가는 것 말고, 무엇이 생활 속에서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되도록 만들어주는 것일까?...아마도 음악회보다는, 이들이 가깝고 쉽게 음악을 접할 수 있는 매체, 라디오가 그 공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처음 뉴욕에 왔을 때 시차극복이 안 되어 새벽녘에 라디오 채널을 돌려가며 클래식 음악을 찾아 귀에 꽂고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뉴욕의 라디오를 통해 처음 들었던 클래식 음악이 중세시대 성악곡이었던 걸로 기억이 된다. '내가 음악사 책에서 봤던, 그리고 일부러 공부하기 위해 선곡집 찾아 들었던 음악을 얘네는 라디오로 듣는구나...!' 하는 게 나의 첫 인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되돌아보니, 라디오에서 중세 성악곡이 나오는 일은 여기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어쩌다 그 곡이 내 귀에 딱 걸렸던건지...ㅋㅋ)
처음에는 라디오를 영어로 듣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으나, 작곡가 이름과 곡명 소개가 전부이고, 사실 작품 해설이나 다른 말이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과거에 한국에서 클래식 FM 프로그램에 원고를 쓰는 것이 직업이었던 나에게 좀 충격이기는 했다--여기서 나 같은 사람이 할 일은 없는 것이구나 싶은... 하지만 계속 라디오를 듣다 보니, 음악을 듣는 일에는 말이 필요 없고, 좋은 선곡만이 청취자를 사로잡는다는 이치를 실감하게 되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이 인터넷으로도 제공이 되기 때문에, 뉴욕의 클래식 라디오 채널이라고 해서 굳이 뉴욕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말이 많지 않은, 그리고 다양한 선곡의 클래식 음악을 줄창 듣고 싶다면, 혹은 일하는 시간의 배경으로 깔아놓고 싶다면, 전 세계의 어디에 계시건 앞으로 소개할 라디오 방송국들의 링크를 따라가 들어보시기를 권한다. (아래 툴바를 통해 이 블로그에 와 보신 분들의 지도를 펼쳐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전 세계 계신 분들이 이 블로그에 와보셨구나 싶은...)

 


몇 달에 한 번씩 진행되는 방송국 기금 모음 캠페인 기간에 WQXR 채널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그림. 피아노와 뉴욕의 상징 옐로우캡이 어우러져 그려진 그래픽이 흥미롭다.  


WQXR (www.wqxr.com)
뉴욕의 대표적인 클래식 음악 방송국. 주파수 105.9 fm. 방송 프로그램의 제목들로만 봐선 참 썰렁하기 이를 데 없다--프로그램의 제목조차 없이, 방송 진행자의 이름만 올라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프로그램들이 특별히 '이 시간엔 이런 음악만'(예를 들어 한국에서 오후 4시경에 라디오를 틀면 성악곡만 나오는 것 같이)이란 컨셉이 없어서, 어떤 시간에 틀어도 다양한 음악들이 흘러 나온다. 주로 바로크-고전-낭만-초기 현대음악 레퍼토리 위주. 

홈페이지 화면의 오른쪽 상단 "WHAT"S ON"에는 현재 방송되고 있는 음악의 제목과 작곡가 이름이 바로 바로 뜬다. 음악을 듣다가, '어, 이거 누구 곡일까?' 싶을 때 바로 확인이 가능하다. 이 창의 하단에 있는 'Listen Now'를 클릭하면 라디오 방송을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

요 홈페이지가 음악을 들을 때 아주 유용한 것이, WHAT'S ON 바로 밑에 WQXR 말고도 3개의 클래식 채널을 더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Q2, FM 93.9, AM 820 요렇게 세 개의 탭이 WQXR 옆에 더 보이는데, 각각의 채널이 또한 차별화된 취향의 클래식을 들려준다.
Q2
현대음악을 주로 들어볼 수 있는 채널인데, 미국에서는 어떤 현대음악들이 자주 연주되고 알려져 있는지, 어떤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실감하게 해준다. 현대음악 라이브 연주를 녹음해서 들려주기도 하고, 작곡가들이 직접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도 하는, 정말 현대 음악의 현장감을 느끼게 해주는 방송이다.
FM 93.9AM820미국의 공영방송인 NPR 채인데, 전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할당된 채널이 아니지만, 때때로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과 재즈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미국의 교양 라디오 채널인 셈. 음악 말고도 교양이 될만 한 다양한 소재들이 방송으로 등장한다. 

WQXR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WQXR 방송국의 홈페이지와 방송을 통해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클래식 음악관련 뉴스와 이슈들을 빠르게 접할 수 있다. 음악에는 말이 필요없다고는 했지만, 음악에 말로 해설을 붙이는 방송이 있다면 이런 방식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싶은 방송이 주로 밤시간에 흘러나온다.
이 가운데 Bill McGlauglin이라는 분이 진행하는 방송이 특히 재미있다. 건반을 앞에 두고 작품에서 특이한 선율이며 화성 진행들을 짚어주면서 방송으로 듣는 음악이 음악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을 해주는데, 클래식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야 할 지, 음악을 듣는 감각을 일깨워주는 쉬우면서도 유익한 방송이다. 토요일 오후 (주로 1시-5시 사이--한국시간으로 새벽 3시-7시)에는 메트 오페라 실황을 중해주는 경우가 많다. 시간대가 한국과는 잘 맞지가 않는 것이 문제이지만, 메트의 오페라 실황을 인터넷 라디오로나마 들어볼 수 있는 방법이다.        

방송국이 어떻게 운영이 되길래 크게 상업적인 색채 없이 양질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는건지 궁금한데, 아마도 일년에 서너번 씩 있는 Pledge (기금 모금) 기간에 청취자들에게 받는 기부금들이 주요 재원이 아닐까 싶다. 워낙은 뉴욕타임즈 소유였으나 수년 전에 워크아웃 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MP3 플레이어의 시대에 누가 굳이 '클래식 음악'을 '라디오' (이제는 인터넷)으로 들을까 싶지만 (그래서 "Help save the classical music on radio in New York City"라는 위 이미지에 적힌 글이 좀 절박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고전적인 매체는 그 나름의 강점이 있는 법. 그냥 틀어놓기만 하면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나오는 이 매체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익숙하게 계속 우리 곁에서 맴돌다가, 나중에는 안 들으면 허전한 존재가 되어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쉬는 무언가로 변해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면 클래식 음악을 가지고 화장실에서도 수다떠는 흰머리 청중이 될런지....^^ 아무튼 클래식 음악만을 듣고 싶으실 때, 이 WQXR의 방송은 아주 유용하다.  

WQXR 이외에도 인터넷으로 들어볼 만 한 클래식 음악 채널이 몇 곳 더 있다. 이곳들에 대한 소개는 다음 기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