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트렌드 by 트렌드

‘간지나는’ 조국, 화려한 ‘공지영’…진보의 패션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nag.com

 
지난 14일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카페. 바네사브루노 재킷과 프라다 가방, 샤넬 립스틱을 바른 이다혜씨(31·홍보회사 과장)가 읽고 있는 책은 김어준이 쓴 <닥치고 정치>다. 그는 <진보집권 플랜>의 저자인 조국 서울대 교수의 열혈팬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의 외피’를 두른 그에게 “왜 진보를 지지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무조건 자기 것을 지키려드는 보수는 촌스럽지만 진짜 진보는 세련됐거든요. 패션이건 정치건 낡은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이 진보 아닌가요? 머리에 띠 두르고 빨간 조끼를 입은 모습이 진보의 상징은 아니죠. ‘간지 나는 진보’가 좋아요.”

(경향신문DB) ‘간지나는 중년’의 대표 조국 교수(왼쪽)·때때로 화려한 패션을 선보이는 작가 공지영(오른쪽).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3국카페(소울드레서, 쌍화차코코아, 화장발)도 이념으로 뭉친 조직이 아니라 옷과 화장품에 관심 많은 여성들의 모임이다. 젊은층은 따분하고 유니폼 같은 정장만 고집하는 보수지도층보다 터틀넥 셔츠에 트위드 재킷을 입은 조국 교수, 머리에 무스와 왁스를 잔뜩 바르고 몸에 꽉 붙는 가죽 코트를 입은 정봉주 전 의원에게 더 열광한다. 여성 정치인의 경우에도 중성적인 모습보다 대담한 귀고리에 핑크 스카프로 몸을 휘감은 강금실 전 장관에게 지지를 보낸다. 

기성세대들은 커피숍에서 악착같이 쿠폰을 챙기면서도 한 달 월급을 털어 가방을 사고 진보정치인에게 표를 던지는 이들을 의아해한다.

트렌드 분석 전문가 김해련씨(에이다임 대표)는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에 외환위기를, 취업할 나이에는 경기불황을 겪고 있는 30대들은 아날로그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 시대로 빠르게 편입된 세대”라고 전제했다. 

그는 “라이프스타일은 상류층을 동경하면서도 정치적인 성향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해체를 요구하는 진보를 추구하고 있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 서해성씨의 의견은 다르다. 서씨는 “진보는 원래 멋쟁이”라며 “대중을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진보주의자들은 낡은 옷을 입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레닌도 명품옷을 즐겨 입었고, 호찌민도 고급양복을 판 돈으로 유학을 갔으며 마오쩌둥의 인민복도 당시엔 가장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패션이었다는 것. 대원군 역시 마고자를 최초로 지어입은 당대의 패션리더였다. 정치학도 출신인 이탈리아의 패션디자이너 미우치우 프라다는 지독한 좌파다. 그는 낙하산 천으로 백을 만들어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도전’을 해서 전 세계에 프라다백 열풍을 일으켰다. 민주당원으로 미국 하원의장을 지낸 낸시 펠로시는 항상 아르마니 슈트에 커다란 진주목걸이로 럭셔리패션을 보여주지만 강인한 정치력으로 ‘좌파 대처’로 불린다. 

(경향신문DB) 덴마크 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된 헬레 토르닝 슈미트 사민당 당수. 명품 가방을 좋아해 ‘구치 헬레’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 젊은이들처럼 왁스를 즐겨 바른다. 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오른쪽). 아르마니 슈트와 진주목걸이 치장을 좋아했다.



덴마크에서 10년 우파정권을 끝내고 사상 첫 여성 총리가 된 헬레 토르닝 슈미트 사민당 당수의 별명은 ‘구치 헬레’다. 명품가방을 좋아해서 얻은 조롱 섞인 별명이지만 극좌 적녹연맹당에서 우파에 가까운 사회자유당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아우르면서 좌파연정의 승리를 이끌었다. 서씨는 무슨 옷을 걸쳤느냐가 진보냐 보수냐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문화평론가 김갑수씨는 “한국의 진보는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멋진 옷차림을 선호하기보다는 다소 위선적일지라도 소박한 삶의 태도, 공정한 사회를 위한 분배와 헌신의 태도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멋쟁이는 고가의 의상과 액세서리를 즐기는 이들이 아니라 옷차림에도 교양이 엿보이는 이들”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