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가공식품에 밀려난 요리사

가끔 아이가 월초에 받아오는 급식표를 들여다본다. 학교급식은 당대의 음식을 말해준다. 아니, 조금 더 보수적이고 진지하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음식을 먹여야 한다는 고민이 있다. 수수잡곡 영양현미밥, 무생채무침, 대파와 고사리나물 같은 것들이 많다. 물론 이런 걸 아이들이 좋아할 리 없다. “이런 거 아이들이 잘 먹니” 하고 묻자 “욱!”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즉각적이다. 그럼 뭐가 환영받아? “이미 만들어져서 들어오는 돈가스, 스파게티지 뭐.” 그렇겠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학교 음식과는 달리 시중은 대개 이런 음식이 아이들의 먹거리다. 아이들 음식뿐만 아니다. 가정의 밥상은 공장이 점령한 지 오래다. 냉장고를 열어보라. 열에 일고여덟은 바코드가 붙어 있는 존재들이다. 자연에서 건너와 최소한의 요리를 거쳐 곧바로 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보존기한과 맛을 늘리기 위한 온갖 첨가물이 들어가는 공장 제품으로 일단 탈바꿈한 후 다시 우리 상에 오른다. 공장은 음식을 이윤의 대상으로 본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어쩌면 불변의 자본 속성이랄까.


 


도시 산업사회는 우리 맛의 기준을 바꾸어 놓았다. 이미 ‘자연물’ 없이 완전한 공장 제품으로만 상을 차리는 사람이 늘고 있다. 밥과 김치 말고는 대부분 마트에서 사온 가공품으로 다시 ‘반찬’을 만든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전자레인지 한 대만 있으면 365일 식탁을 차릴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공장 제품도 결국은 자연물이 있어야 만든다. 그런데 그 자연물을 만들고 잡는 농어민은 이익이 없어 허리가 휘고, 그걸 사먹는 사람들도 대개는 지갑이 빤한 종종걸음 삶이다. 생산자-가공과 유통-소비자가 고루 발전하는 게 아니라 중간단계의 이익이 더 많아진다.



예전에는 있는 사람들이 가공품을 먹었다. 가공한다는 건 고급을 뜻했다. 이제는 반대다. 가난할수록 가공품을 더 많이 사먹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싱싱한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는 과정에 노동력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여성들도 노동을 해야 하고, 지친 그들은 인스턴트를 중심으로 빠르게 요리할 수 있는 재료를 고른다. 시골 농부들의 새참 자리에 공장 빵과 짜장면이 들어선 건 이미 오래전이다. 그것이 도시 노동자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공장이 편리한 음식을 만들어내지만 우리에게 시간을 돌려주지 않는 아이러니라니! 더 빨리 간편하게 먹고 더 싼값의 임금에 더 많이 일하게 만들지 않는가. 공장과 자본은 잉여를 얻어 비옥해지고, 자연인은 그 수레바퀴의 살이 되어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고 마는 현실이 아닌가.





식당엔 요리사가 줄어든다. 가혹한 토지비용과 권리금, 낮은 이익과 무한경쟁으로 결국 ‘인건비’에 손을 댄다. 빈 요리사의 자리에는 점점 공장에서 만든 가공재료가 들어온다. 봉지만 북 찢어 전자레인지로 빙빙 돌리거나 냉동고에서 꺼내 해동하여 팔 수 있는 재료가 환영받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봄이되 봄이 아닌, 요즈음 자영업 식당가의 어두운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