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식당의 감정노동자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사태로 감정노동에 대한 관심이 환기되고 있다. 예상되는 일이겠지만, 사태는 해당 승객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선에서 마무리되는 듯하다. 요는 우리가 감정노동(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진지한 고민이 없다는 점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의 감정을 돈을 주고 ‘산다’는 게 과연 합당한 일인지, 그래도 되는 건지 돌아보게 된다. 러셀 혹실드 교수에 의해 개념이 정리되었다는 감정노동은 ‘감정도 상품’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 먹고살자니 내 본래 감정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고 이미지화된 감정을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접객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요리사라 친근하고 따스하게 보이도록 감정을 조절한다. 튀김 기름이 튀어 얼굴을 지지고 수챗구멍을 청소하다가도 주방 밖에서 손님을 보면 활짝 웃는 것이 바로 감정노동인 것이다. 그래도 손님과 직접 대면할 일이 거의 없는 요리사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야말로 간과 쓸개를 내놓은 불안한 전사들이 ‘고객님’의 불편을 사지 않기 위해 감정노동의 최전선에 처절하게 내몰린 현실에 비하면 말이다.


 



팔자가 그러려니, 내가 택한 직업이니 참고 일하려고 해도 결코 만만치 않다. 국적기를 타면 승무원들의 웃음 뒤에서 우리들이 발견하는 건 ‘존재의 불안’이 아니었던가. 아닌 게 아니라 우리가 돈 몇 푼 내고 저렇게 다른 이들의 감정을 착취해도 되는 것인가 의심이 든다. 게다가 외국 항공사를 이용할 때는 ‘찍소리’도 못하는 이놈의 비굴한 이중적 감정으로 말이다. 나는 서양에서 감정노동자로 일해보았는데, 그들의 노동문화는 친절하되 결정적인 선을 넘으면 가차없는 반격을 한다. 무리한 요구를 하며 무례하게 구는 손님이 있었는데, 지배인이 나서더니 식당 문을 열어주고 당장 나가라고 요구했다. 어기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엄포도 놓았다. 실제 경찰을 부른 적도 있었다. 이때 놀라웠던 건 업주와 다른 손님들의 태도였다. 누구도 그 지배인을 비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감정은 팔지만 자존심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원칙이 존중받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노동이라는 미명 아래 자존심과 인간의 마음 깊은 곳, 남이 손대면 안되는 존재의 한 줌 성역까지 팔기를 바라는 것이다.




식당은 우리가 가장 흔하게 보는 감정노동의 현장이다. 돈을 내고 서비스를 사는 정도가 아니라 작정하고 ‘진상’(진짜 상놈의 준말이다) 짓을 하는 손님들을 볼 수 있다. 여성 접객원에 대한 허다한 성추행과 반말을 접하면서, 나는 몇 번이고 이 짓을 때려치우고 싶었다. 남자직원이라고 별반 다르지도 않다. 몸종에 가까웠던 빅토리아 시대의 집사나 하인보다 결코 나은 대접을 해주지도 않는 것 같다. 나이 오십 넘은 지배인이 따귀를 맞는 것이 결코 별난 일도 아니다. 그나마 대중이 그런 뉴스를 접하게 된 것도 순전히 대한항공 사태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에 어떤 주류 언론이 일개 호텔 접객원이 손님에게 맞고 욕설을 듣는 걸 뉴스로 다루겠는가.


감정노동자 1000만시대다. 감정을 팔아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다 우리 가족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누군가가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