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밀라노가 놀란 한국식 요리

박찬일 | 음식 칼럼니스트


 

요리유학 붐을 타고 외국의 유명 식당에서 일하는 한국인 요리사들이 있다. 대개는 단기 실습생이다. 정식 직원으로 월급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자국인도 취업을 못해서 쩔쩔매는 판에 외국인을 정식으로 고용하는 건 식당주로서 부담이 많다. 또한 그쪽 요리를 잘하는 외국인도 당연히 드물다. 이런저런 이유로 대개는 월급이 없는 무상 실습생에 그치게 된다. 더구나 미슐랭 별이 달린 고급식당이라면 실습생 자리조차 얻기 어렵다. 이름을 올려놓고 몇 년씩 대기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최대 도시 밀라노는 화려한 패션과 미식의 도시다. 미슐랭에서 별을 받은 식당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사들러(Sadler)라는 이름의 식당은 별을 두 개나 받은 터줏대감이다. 이탈리아 역대 총리와 대통령 여럿이 식사를 한 전통 있는 명가다. 놀랍게도 이 식당의 핵심 스태프 중에 한국인이 있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때문에 그의 성인 ‘안(Ahn)’으로 불리는 안경석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정식 요리사인 것은 물론 식당 주인이 절대 놓치려 들지 않는 스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주말 이탈리아 최대 명절인 부활절 주간에 그가 ‘대형사고’를 쳤다. 밀라노를 이끄는 수많은 명사들을 손님으로 앉히고 한국식재료로 만든 뛰어난 음식을 선보였던 것이다. 한 끼 200유로(약 28만원)가 넘는 고가의 코스 메뉴가 한국의 옷을 입고 격찬을 받았다. 부활절 만찬이 끝나고, 손님들은 모두 이 ‘전대미문의 요리’를 만든 이국의 요리사를 만나고 싶어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한국 소주에 적신 마카롱에 이천쌀로 만든 바삭한 칩을 곁들인 요리, 누룽지 튀김이 들어간 티라미수, 막걸리와 식혜를 넣은 셔벗, 한국식으로 만든 모과차에 심지어 장난스럽게 한국의 인스턴트 라면에 초콜릿을 입혀 내놓은 과자까지…. 



막걸리와 한국 인스턴트 라면으로 만든 디저트.




“아예 제가 만든 한국식 요리가 정식으로 메뉴에 올라갔습니다. 하루 네 시간만 자고 주방에서 열여섯 시간씩 보낸 보람이 있다고 할까요.”


그는 내게 전화로 성공의 후일담을 들려줬다. 한국에서 챙겨간 한 권의 요리책이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바로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의 부인인 김영호 여사가 1991년에 발간한 <나의 주방생활 오십년>이다. 한국 헌책방에서 우연히 구한 이 책으로 그는 한국 식재료의 다양한 힌트를 얻었다. 그가 한국의 영혼이 들어간 요리를 처음 한 건 아니다. 이미 2011년에 간장과 된장, 고추장으로 만든 스테이크와 파스타로 현지 식당에서 크게 히트친 이력이 있다. 


지난 정부는 엄청난 예산을 들여 한식 로드쇼를 여러 차례 벌였다. 듣기에 그런 노력이 별다른 홍보효과를 얻은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한 무명의 한국인 요리사가 저 미식의 심장부에 뿌린 한식의 에센스가 빛을 발하고 있는 셈이다. 공부하기 싫어서 호프집 주방에 취직, ‘소시지 야채볶음’ 같은 술안주를 만들며 요리를 시작했다는 한 청년이 지금 밀라노의 미식가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