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계란찜이 측은하다

학교에서 돌아와 까무룩 잠이 들 때가 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면 엄마가 저녁을 짓고 있었다. 달그르르르, ‘스뎅’ 대접이 요란하게 떨었다. 곤로(풍로) 심지를 높여서 중탕으로 계란찜을 하는 것이었다. 물을 두어 사발 붓고, 사기그릇을 엎은 곳에 계란을 풀어 저은 대접을 살포시 얹어놓는다. 간은 소금으로 하는데, 더러 청장(조선간장)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오래된 심지가 타는 냄새에 계란찜 바닥 부분이 타는 냄새가 한데 어우러져 부엌은 그야말로 냄새의 곳간이 되었다. 엄마가 행주로 조심조심 꺼낸 계란찜 대접을 상에 올리면 다른 반찬은 별로 소용없었다. 빨갛게 고춧가루를 뿌린 부분은 아버지가 푹 떠가고, 나는 흰자가 엉켜 부드럽게 요리된 부분을 떴다.




계란찜 바닥의 타서 눌어붙은 걸 박박 긁고, 짭짤한 말간 즙과 함께 떠내서 남은 밥에 비비면 꿀맛이었다. 바닥은 간이 더 세서 주로 어른이 드셨는데, 어린 나는 그게 왜 그리 좋았는지 모르겠다. 태운 단백질과 지방이니 훨씬 더 맛이 있는 법이긴 하겠지만. 계란찜은 수고와 비용을 고려하면 거의 완벽한 음식이 아닌가 한다. 그저 계란을 깨고 젓고 냄비에 넣는 것만으로 충분히 맛을 내니까 말이다.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는 물음은 과학적으로 볼 때 우문이다. 당연히 계란이 먼저다. 계란은 자신의 후세 계란을 만들기 위해 닭을 ‘이용’한다. 비정한(?) 자연의 섭리이고, 우주의 번식 욕망이다. 계란은 누가 완전식품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하나의 완벽한 생명이다. 어미 닭은 막 부화할 즈음의 짧은 시간 동안 병아리가 숨 막히지 말라고 공기를 넣어준다. 우리가 삶은 계란을 깔 때 무심하게 지나치는 우묵한 부분의 공간이 바로 공기가 들어차 있던 곳이다. 홀씨만한 미래의 닭은 노른자에 붙어서 부화를 기다린다. 어미닭이 베푼 노른자의 영양을 듬뿍 먹는다. 흰자가 스펀지처럼 외부의 충격을 보호해주는 완벽한 방에서 말이다. 우리는 무심하게도 그 노른자와 흰자, 그리고 생명의 씨앗을 뒤섞어 소금을 치고 계란찜을 한다.





일본식 계란찜도 먹어봤는데, 양념물을 섞어 아주 부드럽게 쪄낸다. 아이스크림처럼 촉촉한 질감이 매력 있지만 나는 투박한 한국식이 더 좋다. 잘 섞고, 체에 내려서 밀도를 고르게 잡는 계란찜 대신 막 저어서 노른자와 흰자가 제멋대로 엉킨 게 더 좋다. 부뚜막 밥솥 안에서 익거나, 엄마의 계란찜처럼 달그락달그락 끓는 냄비에서 중탕으로 익는 녀석이 더 당기는 것이다.


철새들이 감기에 걸리고, 그것이 사촌격인 닭에 옮아 또 하나의 거대한 막장 비극이 펼쳐지고 있다. 듣기로 좁은 계사 안에 갇혀 있는 닭들의 저항력이 떨어져 감기를 이겨내지 못하니, 결국 땅에 묻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죽이는 행위를 ‘처분’한다고 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에 분개하고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런 심각한 궁리의 한 구석에 맛있는 닭과 계란의 수고가 웅크리고 있으니, 먹는 일이 참 심란하기만 하다. 덜 먹고 덜 죽이고 덜 미안해하고 살 방법을 찾아야 할 당위가 높아져가고 있는 겨울 끝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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