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고통과 영광 그리고 질병

왼쪽 사진부터 <페인티드 베일> <페인 앤 글로리> <작은 아씨들>의 한 장면.


질병이 도래한 시기에 영화를 이야기한다는 게 쉽지도, 편하지도 않다. 그러나 돌아보면 질병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성찰이 문학과 영화에 담겨 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나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런데 한편 늘 의아했던 것이 바로 질병과 사랑이다. <인생의 베일>처럼 말이다.


<인생의 베일>의 주인공인 부부는 콜레라가 창궐하는 곳에 가서야 서로를 마침내 사랑하게 된다. 의사, 간호사로서 매일 죽음과 싸우며 두 사람은 삶의 진짜 의미를 깨달아 간다.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듯 창궐지역을 자원한 남자는 그곳에서 결국 목숨을 잃는다. 역설적인 것은 사태의 원흉이자 불륜녀인 여자는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베일에 가린 듯 인생의 의미는 참 알기 어렵다. 영화 <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이 <인생의 베일>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인생을 어떤 단어로 요약할 수 있을까? 스페인 영화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페인 앤 글로리(Pain & Glory)>, 즉 ‘고통과 영광’이라는 단어로 요약해 낸다. 주인공은 영화 감독이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예술영화 감독인 그는 이곳저곳에서 초청받기도 하고, 진지한 행사의 주빈으로 초대받곤 한다. 하지만 정작 지금 그는 온몸을 강타하는 다양한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하루하루가 힘겹다. 너무 자주 사레에 걸려 기침을 하고, 반복된 척추 수술로 행동도 부자연스러운 데다 통증이 여간 아니다. 수를 세는 게 힘들 정도로 많은 약을 매일 먹는 그는 자신의 삶을 신체를 급습한 다양한 고통의 지도로 설명한다. 


이 고통은 단지 신체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과거 사랑했지만 헤어져야만 했던 연인, 서로를 오해해서 상처만 준 채 다시 보지 않는 사이가 된 페르소나 배우 등 우리가 살면서 후회라고 부르는 것들이 그를 또 힘들게 한다. 그런데 육체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그는 어린 시절과 젊은 때를 자꾸 회상하게 된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과 대면하려고도 한다.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이런 주인공의 삶을 고통과 영광의 시간이라 부른다. 고통도 있지만 영광도 있었다. 어쩌면 고통이란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삶의 증거이자 부산물이다. 가장 고통스러운 육체의 순간에 그는 숨겨져 있던 기쁨을 발견한다. 감독의 자전적 인물처럼 보이는 주인공의 여정은 삶이란 그렇게 고통과 영광의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새롭게 해석된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은 아씨들>에도 여지없이 질병과 고통 그리고 영광이 등장한다. <작은 아씨들>은 ‘조’를 중심으로 한 네 인물의 성장기이자 일대기라고 볼 수 있다. 영광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는 작가로 데뷔하고 성공을 거두며 후학을 기르는 학교도 설립하게 된다. 고통의 측면에서 조는 사랑하는 남자를 순진한 자기 확신과 시간 차로 잃고,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는다.


중요한 것은 조의 인생이 영광과 고통으로 이분화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조의 삶을 줄거리로 요약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성장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고통이 어떤 성장에 직결되었는지 그리고 어디까지가 고통이고 어디서부터 영광인지 나눌 수는 없다. 그렇게 뒤섞여 있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니 말이다.


천사처럼 착하고, 눈처럼 사랑스럽던 셋째 딸 베스는 아픈 이웃을 돌보다 성홍열에 감염된다. 어머니가 아버지 간병차 떠난 이후 다른 자매들이 아픈 하멜의 집에 방문하지 않자 베스가 혼자 나섰다가 감염된 것이다. 성홍열을 가까스로 이겨냈지만 결국 베스는 후유증을 견뎌내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베스는 자매 중 가장 착한 소녀라서 오히려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난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삶을 지배하는 힘으로 중력과 은총을 이야기했다. 그는 고귀한 덕이 욕망보다 약하다고 말한다. 먹기 위해서 새벽부터 긴 줄을 설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직접 몸을 내어 행동하는 것은 본능이나 욕망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만큼 힘들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어는 폭풍을 가라앉힐 힘이 없고, 자연은 칭호에 무관심하다.’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폭풍처럼 닥친 질병의 재해를 언어로 가라앉힐 수는 없다. 그러나 언어가 중력이라면 행동은 은총일 테다. 본능과 다른 방향이지만 많은 의료진이 자원해서 힘든 곳으로 모이고 있다. 도움의 손길들도 하나둘씩 늘어난다. 쓸데없는 말의 혼란을 만드는 뉴스보다, 어떻게든 도움을 보태고자 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더 의미 있다. 삶이 고통과 영광으로 이루어진 아이러니라면 지금 우리는 고통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이리라.


<강유정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