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투명인간과 피해자의 서사

<인비저블맨>의 주인공은 피해자인 여성이다. 영화 속에서 투명인간 슈트는 폭력의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 <인비저블맨>은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투명인간이다. 1897년 허버트 조지 웰스가 소설로 써낸 이후, <투명인간>은 1930년대 미국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꽃을 피웠다. 소설에 묘사되었던 붕대로 몸을 감싼 투명인간의 이미지는 초기 특수효과의 발전 속에서 눈앞에 재현되었다. 인류가 경험한 거의 최초의 SF적 상상력이었으며 특수효과였을 것이다. 이후 한국에서도 두 번 정도 <투명인간>이 제작되었다. 서양의 경우는 훨씬 더 많이 리메이크되거나 새로 만들어졌는데, 한 남성 과학자가 연구에 매진하다 스스로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는 큰 줄거리는 바뀌지 않았다. 


<원초적 본능>으로 유명한 감독 폴 버호벤이 만든 2000년작 <할로우 맨> 역시 <인비저블맨> <투명인간>의 리메이크이다. 연기 잘하는 케빈 베이컨이 편집증적 과학자 역할을 맡았고, 끈적하고 무서운 투명인간의 역할을 해냈다. <젠틀맨리그>나 <판타스틱4>에도 투명해지는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들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투명인간은 일종의 판타지적 능력이거나 한계를 넘어선 과학자의 오만으로 유전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인비저블맨, 투명인간 서사의 주인공은 언제나 그 미친 과학자 그리고 남자였다. 그 과학자 곁에 늘 여성이 있기는 하지만 일종의 피해자 내지는 원칙과 사랑으로 그 미친 과학자를 품어주는 모성적 여성 이미지였다. 늘 가해자가 주인공이었고 피해자는 가해자의 성격을 구체화하는 에피소드로만 존재해왔다. 가해자에게 서사의 초점이 맞춰져 온 게 바로 투명인간 서사의 흐름인 셈이다. 


2020년 2월 개봉한 리 워넬 감독의 <인비저블맨>의 차별성이 여기에 있다. <인비저블맨>의 주인공은 바로 피해자, 여성이다. 영화 <인비저블맨>은 과학자가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열심히 연구에 매진해 투명인간 슈트를 완성했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써먹느냐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투명인간 슈트는 폭력의 수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묘사된다.


지금까지 투명인간 서사에서 주인공은 늘 남성이며 과학자였다. 과학자에 대한 잠정적 성별의 고정값이 남성이었다는 것도 전근대적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개발해낸 새로운 기술에 대한 공포와 매혹만이 중요했다. DC 코믹스를 비롯한 할리우드 초기 SF 상상력도 여기서 멀지 않았다. 유전자조합에 미친 과학자, 신체 변형에 빠진 과학자 등등 초기 SF 서사들은 과학에 대한 동경과 공포를 그려냈고, 미지의 영역, 처녀지에 발을 내디딘 탐험자들로서 과학자들의 파멸과 실수를 짚어냈다. 


2020년 <인비저블맨>은 사방이 훤하게 뚫린 ‘유리로 만든 집’에 사는 한 여자 세실리아로부터 출발한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잠든 남편 몰래 여자가 집 밖으로 탈출하는 과정을 그리기 때문이다. 남편인 애드리안은 편집증적이며 강압적인 사람이다. 여자의 옷차림이나 식성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통제하려 한다. 


그런 애드리안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아내에게 복수하기 위해 투명인간 슈트를 입고 접근한다. 흥미로운 것은 세실리아가 이 남자의 접근을 눈치채고 호소하는 과정이다. 남편이 자살했다며 사진 증거까지 봤지만 세실리아는 보이지 않는 남편의 접근을 눈치챈다. 그래서 거듭, 남편이 자신을 살펴보고, 괴롭힌다고 호소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말 그대로, 그는 보이지 않는 존재, 투명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제 세실리아가 폭행을 당하고, 목숨이 위협받는데도 경찰은 믿어주지 않는다. 그녀가 호소할수록 세상은 세실리아를 미친 여자 취급한다.


피해자가 경험하는 폭력이 아니라 증거로서의 존재를 내세워야 하는 세실리아의 입장은 어떤 점에서 사이버 성폭력이 만연한 사회에서의 피해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물리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신체적으로 강간한 것이 아니라면 집행유예, 기소유예 등 관대한 처벌을 내리는 양형기준도 문제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아닌 일종의 눈에 보이는 가해자에 매몰된 구태의연한 관념 속에서 피해자의 절규가 쌓여간다. 가해자가 숨을수록 피해자의 목소리는 왜곡된다. 사이버 성폭력과 성착취는 보이지 않았지만 존재한다. 가해자들이 닉네임과 아이디 등의 투명인간 슈트로 정체를 가렸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호소가 있었고 절규가 존재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호소를 외면했던 것일까? 세상엔 보이지 않는 가해자가 있다. 아니 많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자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귀 기울였다면, 적어도 이토록 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서사가 주어져야 하는 쪽은 가해자, 범죄자가 아니라 바로 피해자이다. 가해자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다. 우리가 정말 들어야 할 서사는 피해자의 서사이다.


<강유정 | 강남대 교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