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2)하나뿐인 아들아 ! - 김별아 소설가


자유와 침묵의 시간이 가까워 온다. 모카신을 신은 듯 발자국 소리도 없이, 솜씨 좋은 도둑처럼 가만히 남은 생애를 훔치러 다가오고 있다. 미립이 트이기 전 세상에 어섯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그 순간을 수없이 상상하곤 했다. 두렵기에 더욱 똑바로 바라보려 한다. 뒷걸음질하지 않기 위해 한층 바싹 다가선다. 애초에 예행연습이라곤 할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끝없이 나 자신을 잡죄고 다그친다. 고단하다. 그때라면 푹 쉴 수 있겠지.

 

혜준! 내 하나뿐인 아들!

 

어리석고 약한 인간이라는 존재는 숨이 붙어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삶의 욕망을 떨칠 수 없다. 그처럼 불가항력의 미련과 회한을 예상해 거듭 마음을 다잡아도 내게 남은 마지막 욕망, 그리고 미련과 회한은 오로지 너에 대한 것이다. 너를 잃어야 한다는, 네게 어미를 잃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다락같이 겁이 나고 슬퍼진다. 옛사람의 말이 옳다. 다정도 병이다. 아리송하던 법문을 이제야 알아듣겠다. 사랑이 없으면 걱정과 두려움도 없을지니, 미움만큼이나 사랑도 두지 말라고.

 

혜준! 너는 엄마의 처음이자 끝이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 엄마는 스스로 지은 마음의 감옥에 갇힌 채 외롭고 괴로웠다. 철저한 이기심을 갑옷처럼 껴입고, 희생이나 헌신 따위는 말뜻조차 모른 채 냉소했다. 하지만 네가 내게 오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너를 처음 만났던 눈 내리는 11월 아침부터 나는 새로이 태어나 다시 한번 살게 되었다. 그토록 잊었던 삶, 모르던 삶은 참으로 경이롭고 신비했다. 너는 나의 시인이자 스승이다. 내 등에 업힌 네가 떨어지는 은행잎들을 보며 “노란 비가 내린다!”고 외쳤던 때는 내 생에 가장 황홀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과 주저함 없이, 불안과 의심과 회의 없이 ‘사랑’을 말하게 한 첫 번째 사람, 그게 바로 너였다.

 

소설가 김별아 ㅣ 출처:경향DB

 

하지만 고백하건대, 무엇보다 내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 속에서 자라나 내 허물을 찢고 태어난 네가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전까지 엄마는 얼마나 오만했던지, 온전한 나의 의지로 이루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개입하고 주장하고 강다짐하며 내 작고 옹졸한 세계의 독재자로 살았다. 그런데 나를 닮지 않아 명랑하고, 나를 닮지 않아 평화롭고, 나를 닮지 않아 경쟁과 성취에 무심한 네가 나의 신기루를 산산조각 낸다. 내가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진실 앞에선 다만 겸손해야 마땅하다. ‘자식 둔 죄인’이라는 말을 곱씹노라니 무엇도 교만히 장담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함부로 굴 수 없다. 너무도 당연시 여기던 일상이 알거나 알지 못하는 무수한 기적의 소산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는 감사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네 아픔에 함께 괴로워하노라면 세상의 아픔이 비로소 이해되고, 내가 지킬 수 없는 너의 미래를 생각하면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은 곳으로 만들고픈 열망이 솟구친다.

 

혜준! 엄마와 네가 함께 오른 산들을 기억하고 있겠지? 중학생인 너와 길벗이 되어 우리 땅의 등줄기를 샅샅이 오르내렸던 기억. 엄마는 네게 집이나 돈을 물려줄 순 없을지라도 추억이라는 유산만큼은 꼭 물려주고 싶었다.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고 무엇으로도 훼손되지 않을 온전한 우리만의 보물.

 

“혜준아! 훗날 엄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을 때, 산을 보며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을 추억하렴. 저 아득한 능선을 엄마와 같이 탔지, 우리 그때 참 힘들지만 즐거웠지….”

 

기나긴 마루금의 한 지점에 머물러 서서 조용히 속삭인 내 말에 너는 맑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주억거렸지.

 

“알았어, 엄마. 꼭 그럴게. 그렇게 산과 함께 엄마를 추억할게.”

 

언젠가 맞이할 이별의 순간이 오면 함부로덤부로 내뱉었던 말들, 진실을 가장한 이야기들, 거짓 상처와 삿된 욕망, 그 모두를 지우고 가련다. 홀연히 떠나는 길이 웅숭깊은 산길처럼 어리석고 못난 나를 너그럽게 품어 주리라 믿으며, 다만 네게 추억을 상속하고 떠나련다. 사랑한다, 내 아들! 네 엄마로 살았던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마지막의 그때 웃으며 말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