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 마지막 편지

[내 인생 마지막 편지](3) 권지예 - 넌 참 많은 걸 주고 떠났구나

권지예 | 소설가

 

 


오늘 오후에는 네 사진을 보았어. 낡아서 이제는 희미해진 작은 흑백사진 안에 너와 내가 집 대문 앞에 서 있구나. 이 사진 기억나니? 우리 두 사람은 햇빛 때문에 살짝 찡그린 얼굴로 차렷 자세를 하고 있네. 아마도 난 열 두 살, 너는 아홉 살. 참 촌스럽긴! 나는 단추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고 너는 스웨터에 바지 차림이야. 나보다 반 뼘쯤 키가 큰 네가 입은 줄무늬바지를 보니 지금도 가슴이 아프네. 키는 작아도 내가 너의 언니라서 너는 늘 내 옷을 물려 입었지. 키가 큰 동생이 언니의 헌옷을 물려 입은 탓에 복숭아뼈가 도드라진 가는 네 발목이 껑충하게 드러나 있네. 거기다 오래 입어서 무릎이 나온 탓에 굵은 줄무늬가 꽈배기처럼 꼬여 다리가 개다리처럼 우스꽝스레 보인다.

 

너 떠난 지 34년째. 이 사진 밑에 34년을 보관해온 종이 뭉치가 있구나. 너의 글들을 복사한 종이야. 복사잉크는 세월 따라 날아가 글씨 흔적이 희미해졌지만 난 이걸 볼 때마다 가슴이 쓰라려. 네가 떠난 후 발견한 글들이야. 어릴 때부터 글 솜씨와 그림 솜씨가 뛰어났던 너를 보면 난 늘 샘이 났어. 그런데 넌 덜컥 소설의 주인공처럼 치명적인 병에 걸렸지. 오랜 투병생활의 고통을 노트 위에 남몰래 쓰고 그리며 달랬던 걸 너를 보낸 후에 난 발견하게 되었어. 사십구재 때 원본은 태웠지만 몰래 복사해놓았던 그 글 뭉치를 보면서 불행한 천재의 비극과 생의 아이러니에 치를 떨곤 했었지. 사십구재 전날, 너는 내 꿈에 나타나서 작가가 되고 싶었던 너의 삶을 대신 살아달라고 부탁하고 사라졌어. 운명이었는지, 나는 소설가가 되었고, 너에게 헌정하는 내 첫 장편소설에선 한풀이하듯 너의 이야기를 써냈었지.

 

내가 가슴이 아팠던 건 꽃피우지 못한 너의 재능뿐 아니라 어린 나이에 홀로 죽음을 맞으며 그 고통에 신음했던 너를 위해 나는 뭘 하고 있었나 하는 자책감 때문이었어. 왜 우리는 네가 어리다는 이유로 끝까지 너에게 네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함께 껴안지 못했는지! 하지만 네가 남긴 글을 보면 너는 너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네게 그걸 비밀에 부쳤던 가족들이 가슴 아파할까봐 죽는 날까지 모르는 척 했더구나. 투정이나 엄살조차 부려보지 않았던 열일곱 살의 너. 너는 그런 애였어. 과묵하고 잘 참고 잘 삭이는 속 깊은 아이. 하지만, 네가 남긴 처참하고 아름다운 글들….

 

소설가 권지예 ㅣ 출처:경향DB

 

어릴 땐 네가 내 옷을 물려 입었지만, 너는 내게 참으로 많은 것을 물려주고 떠났지. 너는 나를 작가로 만든 천국의 멘토였고, 우리 가족에게는 귀중한 선물을 주었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짧지만 의연했던 너의 삶은 우리에겐 인생에서 많은 고통을 이기게 해주는 진통제였기 때문이야. 바로 이렇게 생각하면 다 참을 수 있었어. 그애는 이것보다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 식구들은 웬만큼 아파도 울지 않아. 특히 너를 가슴에 묻은 엄마는.

 

그런데 엄마가 요즘 많이 아프셔. 너 떠나고 힘겨운 세월을 네 생각하며 세상을 견디던 엄마도 이제 칠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되었잖아. 수술을 여러 번 하셨는데,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하시는 거야. 거짓말인 줄 알지만 나는 다 알고 있지. 그런데 얼마 전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니 엄마가 그러시는 거야. 내가 아무리 엄마라도 그 애의 아픔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단다. 그냥 많이 힘들고 아팠겠구나 했지. 그런데 사람은 그 상황이 안 되면 이해를 못해. 요즘은 그애 생각이 많이 나.

 

나는 그 말에 가슴 한쪽이 무너지는 거 같았어. 삶의 희망을 단단히 움켜쥐어야 할 엄마가 마음이 약해진 걸까? 하지만 그런 약한 마음이라도 내게 표현하는 엄마가 다행으로 여겨졌어. 만약 내게도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온다면 나는 그것을 준비된 상태로 맞이하고 싶어. 그리고 가장 먼저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고 위로를 받고 싶어. 죽음 또한 축복 속에서 맞이하고 싶은 건 이기적인 욕심일까? 어쨌든 마지막 시간이 온다면 나보다 먼저 죽음을 맞이했던 인생의 선배인 너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 너무도 그리운 M, 그곳에서는 평화롭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