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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마지막 편지](5) 권여선 - 나의 사랑 강쥐에게

권여선 | 소설가

 

 

 

오래전에 어느 점쟁이가 그랬다고 우리 엄마가 말했지. 당신 막내딸 쉽게 시집 못 간다고. 엄마는 깜짝 놀랐지. 하지만 점쟁이는 느긋하게 그랬대. 걱정할 것 없다고, 늦게라도 눈이 뒤집혀 시집 보내달라고 날뛰는 날이 온다고, 그때 냉큼 보내면 된다고. 엄마는 까맣게 잊었겠지만 마흔 살에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 점쟁이를 생각했지.

 

당신과 결혼하지 못하고 떠나게 돼서 슬픈 건 아니야. 결혼한다고 우리에게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오히려 당신 딸에게 쌍꺼풀 수술을 못해주고 가는 게 더 마음에 걸려.

 

나는 당신 딸을 직접 만난 적이 없지. 당신이 보여준 사진 속에서 그 아이는 앞머리를 눈까지 내려오도록 덮고 있었어. 눈이 작아 그런가 싶어 꼭 쌍꺼풀 수술을 해주고 싶었는데, 그 아이가 그런 것 하기 싫다고, 요즘엔 이렇게 작은 눈이 더 매력적이라고 말했다는 얘길 듣고 기뻤어.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이 되면 소년같이 중성적인 당신 딸도 어느덧 숙녀가 될 테고, 그때쯤엔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그때 당신이 싫은 소리 안 하고 꼭 해주었으면 해.

 

강쥐, 라고 내가 장난스럽게 당신을 부르던 방식을, 그 목소리를, 당신이 오래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만, 강쥐, 라고 당신을 불렀을 때 내가 평범하게 행복했다는 것만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어.

 

소설가 권여선 l 출처:경향DB

평범하게 행복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은 고만고만하지만 불행은 각양각색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지. 나는 그 말 속에서 불행한 사연들의 다채로움보다 고만고만한 행복을 발견하는 잔잔한 마음에 더 관심이 갔어.

 

사람들은 언제나 특별한 것에 주목하고 사로잡히지. 나도 예전엔 그랬지만, 이제 나는 삶이 불행한 건 특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특별하다는 건 충격을 주고, 충격은 일상의 시간을 끊어버리니까.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우리의 시간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데서 기쁨과 행복을 느꼈어.

 

그것도 시시각각 숨막히도록 특별하게가 아니라, 자연스럽고 편안하고 평범하게. 따뜻한 봄밤을 산책하는 느린 발걸음처럼.

 

가끔 우리가 서로에게 서먹해지는 순간도 있었지. 둘 다 막내라 그런지 어느 쪽에서도 먼저 통 크게 손 내밀 줄 몰라 하루 종일 말을 안 하고 지낸 적도 있지.

 

그러다 어찌어찌 화해가 되면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 죽을 뻔했는지를 서로에게 고백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자고 약속하곤 했지. 이런 유치함 때문에 톨스토이는 행복이 다 고만고만하다고 말했는지도 몰라.

 

다른 일들은 그렇지 않은데, 사는 일에는 마지막 같은 건 없고 그저 중단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쉰아홉을 산다고 일흔아홉을 산다고 우리가 함께 사는 일을 그만둘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은 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중단을 아예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야. 아니, 오래 생각했지. 그럴 때, 그렇게 무쪽 자르듯 한쪽의 삶이 증발되어 버렸을 때, 남은 사람의 머릿속에 박힌 기억의 상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처리를 내가 맡는 게 좋을까, 당신이 맡는 게 좋을까. 아주 오래 생각했지. 내 생각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내가 맡고 싶었어. 그런데 그 짐을, 아무에게도 알려지면 안되는, 동물에 가까운 유치한 소리를 내며 아기짓거리를 하고 살던 우리의 시간들을, 통째로 당신에게 맡기고 떠나게 돼서 미안해.

 

그러니 부디, 강쥐, 라고 부르던 내 목소리는 기억하지 말고, 그렇게 부를 때 내가 느꼈던 행복만을 기억해줘. 늙은 엄마에게 시집 보내달라고 눈 까뒤집고 날뛰지 않아도 좋았던, 우리의 고만고만하고 평범했던 동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