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동물 윤리

간혹 거리에서 특이한 간판을 볼 때가 있다. 돼지나 소, 닭이 엄지를 척 치켜세우고 있는 그림이다. 무심코 지나쳤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이야말로 참 대단한 종족이라는 생각도 든다. 도살되어 먹히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웃는 얼굴로 광고까지 하는 가축의 형편은 도대체 무엇인가 싶은 것이다. 돼지가 분홍색 앞치마를 두르고 입맛까지 다셔가며 웃는 그림은 희화를 넘어 어떤 상징으로까지 읽힌다.

 

우리는 보통 가축을 세 번 죽인다. 비육을 위해 치르는 수많은 곤란한 지경에서 한 번 이미 죽인다. 이를테면 살을 찌우기 위해 좁은 축사에 가둬두고 운동을 제한하는 상황들이 그렇다. 도살할 때 두 번째 죽이고, 죽은 후 처리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죽인다. 특히 별 볼 일 없는 부산물이 거칠게 취급되는 환경은 가축이 원래 생명이었던가 하는 의문까지 들게 한다.

 

가축의 어떤 부위를 사려고 도매시장을 수소문했는데, 서로 다른 날짜에 잡힌, 품종도 서로 다른 수많은 개체의 그 부위가 서로 뒤엉켜 냉동되어 있었다. 해동해서 낱낱이 파헤쳐 보기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언제 어떻게 도축된 것이 모였는지 주인도 잘 몰랐고, 싸구려 부위를 대충 모아놓고 파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판국에 원산지 증명이고 뭐고 가져다 쓸 엄두가 나지 않는다. 가축의 죽음에 대한 품격 있는 대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걸 먹는 인간의 존엄이 이런 판국에 뭐가 필요하겠느냐는 의문이 드는 그런 지경이었다. 아직 위생적인 취급과 투명한 시장도 잘 지켜지지 않으니 동물 윤리를 들먹이면 얼마나 허망한 주장이겠는가.

 

 

공장식 축산 반대 퍼포먼스 (경향DB)

 

 

고기를 먹지 않거나 덜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거나, 채식이 지구를 살릴(적어도 더 오래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하는 이들이 많다. 그렇지만 인간이 가축을 먹어온 오랜 관습을 없앨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절이랄까, 아니 동정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태도가 필요한 게 아닌지. 태도는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결국 그것이 삶의 일부를 넘어 그 사람 자체가 되리라.

 

어려서 집에서 닭을 길렀다. 놀랍게도 이 녀석은 식구들을 다 기억했다. 흔히 ‘닭대가리’라고 말하는 인간의 인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녀석을 통해 깨달았다. 나중에 닭은 아주 영특한 동물이고 나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꽤 있다는 사실도 접했다. 닭을 먹느냐 마느냐(똑똑하니 먹지 말자?)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이 있는 존재에 대한 우리들의 대접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살처분이라는, 생명에 대한 어떠한 염치도 깃들어 있지 않은 아우슈비츠적 용어가 문득 생각난다. 그 용어가 정부와 언론에서 공식적으로 쓰였던 우리나라에서 너무 바라는 게 많다고 누가 지적할 듯하다.

 

지능이 높은 동물의 고기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언젠가 도마에 올려놓은 낙지가 자신의 최후를 감지한 듯 머리를 부풀리고 용을 쓰는 장면을 목도했다. 가을이다. 꽃게찜을 먹을 철이다. 찌기 위해 산 꽃게를 찬물을 넣은 찜통에 그대로 넣는 건 좀 참아주었으면 좋겠다.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면서 꽃게는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내가 저지른 수많은 비겁한 살육에 반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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