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멍게와 해삼

 

횟집에 가면 늘 나오는 기본 안주가 있었다. 해삼과 멍게다. 얼마나 흔했던지 ‘리필’도 잘해주곤 했다. 30여년 전, 서울은 횟집이 별로 없었다. 일식(日食)도 아니고 ‘日式(일식)’이라고 써놓고 장사하는 한·일 절충식 일식집 아니면 회다운 회는 아주 드물었다. 광어와 우럭이 흔하게 양식되던 때도 아니었고, 이른바 강원도식 물회라는 ‘물가자미 막회’ 같은 요리들을 하는 가게도 막 서울 중심부에 열릴까 말까 하던 무렵이었다. 그래서 민물회도 많이 먹었다. 이스라엘 잉어인 속칭 향어와 얼마나 잘 잡혔던지 막 퍼주던 붕장어가 세트였다. 붕장어는 일본말인 아나고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인천 연안부두의 어시장에나 가야 좋은 회가 있었고, 서울내기들은 회를 잘 먹을 줄 모르던 때였다. 그런 시절에도 멍게와 해삼은 만만했다. 중국식당에서도 국내산 해삼을 말려서 요리를 했으니까. 당시 ‘중공’이었던 중국과는 무역이 없어서 중국산 건해삼을 구할 수 없던 때였다. 좀 더 시간을 거슬러 가면, 초등학생 때도 서울 애들은 멍게·해삼을 먹었다. 믿어지지 않는 말인데, 초등학교 앞에 봄이면 멍게·해삼 장수가 사과궤짝이나 리어카에 놓고 초장을 찍어서 팔았다. 옷핀을 하나씩 쥐여주면서. 톡 쏘는 초고추장에 멍게·해삼을 찍어 먹는 초등학생들을 상상해보라. 어른 술안주나 해야 할 것을 그때 초등학생은 떡볶이 먹듯이 간식으로 먹었다. 학교는 미어터졌고, 먹잘 게 없어서 쇼팅으로 튀긴 핫도그며 떡볶이를 먹던 어린이들이 별미(?)로 멍게·해삼을 먹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런 추억의 ‘국떡’(국민학교 앞 떡볶이)집은 노포가 없다. 떡볶이 장사가 그다지 시원할 리 만무였고, 늘 불량식품 논란에 휩싸였다. 더구나 학생이 줄고, 그나마 과외며 학원으로 돌아치느라고 학교 앞에서 친구들끼리 떡볶이 사먹는 문화가 없어진 때문이다. 더러 남아 있는 학교 앞 추억의 떡볶이집에는 아이들보다 어른 손님들이 더 많다. 추억 찾아서 돌아온 엄마들이다.

 

하여튼 멍게의 맛이 어땠냐면, 이런 희한한 맛이 있나 했다. 멀리 통영에서 대량으로 생산되어 판로를 제대로 찾지 못해 초등학교 앞까지 왔을 터인데 그 별난 해물의 맛을 아이들이 잘 알기나 했겠는가. 특유의 휘발성 향이 아직도 기억난다. 더러운 나무 도마에 멍게를 올려 손질해주고 먼 산 보며 담배를 피우던 아저씨가 생각나는 것과 함께. 해삼은 꼬들꼬들한 맛이 기억나는 정도다. 요즘엔 곁들이 안주가 아니라 한 접시에 2만원은 줘야 먹을 수 있는 귀한 물건이다. 한때 노량진에서 박스로 사서 친구들끼리 배터지게 먹었던 멍게도 이젠 마냥 싼 해물이 아니다.

 

진달래 지고 철쭉 피면 멍게에 맛이 든다고 했다. 바다 수온이 올라가면서 멍게가 살찐다. 시중에 벌써 나온 멍게가 제법 실하다. 다음달에는 통통하고 향긋한 멍게를 실컷 먹을 수 있으려나. 산지에 주문해 먹으려니 그놈의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가 늘 부담스럽다. 수산시장에 나가봐야겠다. 아주머니들이 칼로 일일이 까주시기도 하니, 주말엔 노량진 같은 수산시장 나들이가 어떨까 한다. 제발 호객행위나 좀 없었으면 빌 뿐.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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