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서해안에 갔다

요리사 후배들과 종종 산지 재료 기행을 간다. 실은, 한잔 마시자는 목적이 더 크다. 들과 산과 바다에는 제철이 있다. 많이 잡혀서 제철이고, 맛이 좋아서 제철이다. 둘 다 해당되면 진부한 표현이지만 금상첨화다. 아무래도 바다를 가게 되는데, 살아 움직이는 싱싱한 해산물을 보는 기쁨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는 서해안 어디든 두어 시간 안짝에 닿는다. 무슨 무슨 축제를 한다는 항구는 가급적 피한다. 인심이 아무래도 들쑥날쑥하고, 번잡스럽다. 조금씩 움직여서 인근의 작은 항구나 작은 도시의 장터를 찾는 게 요령 있는 장꾼과 술꾼의 비밀이다. 주중에 시간 내기 어렵겠지만, 값은 한다. 주말보다는 주중, 번잡한 곳보다는 한산한 어항으로. 


간재미라고 부르는 작은 가오리를 먹는 맛이 우선이다. 가오리라고 해야 맞고, 넓게는 홍어과에 속하는 물고기인데 그냥 이쪽에서는 간재미라고 해야 맛이 난다. 지금이 제철이다. 산란을 하고 나면 맛이 적어진다.



“뼈가 연하고, 살이 달아.” 장터에서 함지에 간재미 몇 마리를 놓고 파는 할머니들의 단순 명료한 답이다. 그렇다. 당진부터 더 아래쪽 태안, 그 아래쪽까지 간재미는 두루 잡힌다. 장터나 어항에 가면 잡아온 간재미를 활어로 판다. 껍질을 벗겨 쓱쓱 썬다. 오이와 미나리(이것 역시 제철의 묘미다)를 섞고 매콤하게 무친다. 간재미의 잔뼈와 차진 살이 씹히는 맛은 계절의 고마움, 살아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마침 봄바람이 부는데, 아아 또 이렇게 한 시절이 가는 것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것은 술안주에 제격인, 마음의 부산물이다. 


이 동네에선 꼭 횟집에 갈 필요가 없다. 장터에 가서 어물을 산 후 가까운 식당에 가져가면 요리를 해준다. 이른바 ‘양념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차림과 요리 비용을 받고 가져온 해물을 차려낸다. 그 인심도 후해서 기분 좋고, 똑같은 주정(酒精)일망정 브랜드가 다른 지역 소주도 한 잔 마시는 게 또 얼마나 좋은지. 불행하게도 요즘은 지역에 가도 거의 수도권 브랜드를 팔지만. 슬쩍 내가 물어보는 수작이 있는데, 주인 아주머니더러 집 김치가 좀 있는지 물어본다. 봄에는 아무래도 묵은 김장이 좀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충청도 해안 김치는 일미 중의 일미다. 그것도 묵은 김장이라니.


갑오징어도 철을 맞아 서해안에서 많이 올라오는 어종이다. 이 동네에서 오징어는 그냥 갑오징어를 뜻한다. 서해안에서도 우리가 많이 먹는 살오징어가 크게 잡히지만 여전히 오징어는 갑오징어다. 살아 있는 것이라 살이 투명할 만큼 맑고 탄력 있으며, 조금 놔두면 찰기가 생긴다. 혀에 달라붙을 만큼. 당연히 회를 치는 것이 최고다. 오천에서 많이 나오는 키조개도 여전한데, 컴컴한 바다를 발로 더듬어 잡는다는 그 검고 멋진 조개는 은근한 서해의 펄 맛을 보여준다. 이게 전부일까. 봄과 함께 진달래가 지고 철쭉이 피면 진한 맛이 든다는 바지락을 먹지 않고서야. 아무것도 넣지 않고, 그저 파나 조금 뿌려서 끓인 이 계절의 바지락은 뿌연 국물이 속을 달래준다. 그러고는 봄은 또 한 해를 기다리라고 훌쩍 가버리는 것이다. 봄은.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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