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멍게의 추억

봄에 입맛도 깔깔하여 멍게 좀 사서 김과 참기름을 뿌려 덮밥을 해먹었다. 멍게의 부드럽고 여린 살에서 좋은 향이 난다. 지금부터 맛이 좋을 조갯국을 곁들였다. 멍게는 아직 철이 이른데 깊은 맛이 제법 들었다. 멍게 특유의 향은 익히면 기분 나쁜 냄새로 바뀐다. 그래서 멍게는 탕도, 국도 끓이지 않고 대개 날로 먹게 마련이다. 요리사들은 희한한 음식을 잘 해먹는다. 늘 이런저런 재료를 다루니 융통성이 좋다. 멍게와 해삼을 넣고 식초를 넉넉히 쳐서 미역냉국을 만들면 아주 맛있다.

이탈리아는 수산시장이 잘 발달해 있다. 해안가 도시에는 한국처럼 싱싱한 생선을 파는 시장이 손님을 부른다. 그런 시장을 많이 다녀봤지만 멍게는 못 봤다. 생선을 날것으로 잘 먹지 않는 그네들의 관습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해삼은 ‘바다 오이’라고 부르면서 먹긴 하는데, 흔하지는 않다. 말린 해삼을 좋아하는 중국을 빼면 아무튼 멍게와 해삼은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재료가 아닐까 한다. 횟집에서 밑 요리로 나오거나 메뉴로 가장 흔하게 내놓는다. 언제나 ‘멍게와 해삼’ 식으로 하나로 묶이는 것도 일종의 관습일까. 그러나 해삼이 비싸지면서 요즘은 멍게 혼자 외롭게 접시에 담기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억의 톱니를 옛날로 돌려보면, 흔하디흔한 게 멍게와 해삼 세트였다. 학교 앞에 떡볶이 노점이 있으면, 그 옆에 멍게 해삼을 파는 ‘구루마’가 올 정도였다. 초등학교 정문 앞에 말이다. 그 시절, 초등학생이 십원짜리 몇 장 내고 멍게 해삼을 먹었다면 믿는 이가 별로 없지만 사실이다. 낮술 마시는 어른 옆에 천연덕스럽게 서서 이쑤시개 같은 걸로 썰어놓은 멍게와 해삼을 초장에 콕콕 찍어 먹었다. 아마 충무(당시 통영의 지명) 일대에서 멍게 양식이 대대적으로 성공하면서 밀어내던 물량이 그렇게 도시에 풀렸을 것이다.




멍게의 주산지는 통영이다. 국내 생산량의 70퍼센트 이상이라고 한다. 통영 시내를 벗어나면 멍게양식장이 많이 보인다. 제철이 다가오면서 작업하는 곳이 많다. 로프에 매달려 빨갛고 탐스럽게 자란 멍게가 줄줄이 딸려 나온다. 워낙 멍게 생산이 많아서 생산지에서는 젓을 담그거나 작업 후에 냉동하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에서 멍게를 주문해도 싱싱한 놈이 산지에서 다음날이면 배달이 된다. 양이 많아서 한꺼번에 먹기 어려울 때는 젓을 담글 수 있다. 멍게 살을 발라내어 해감을 씻어낸 후 무게를 달고, 그 중량의 10퍼센트 정도 소금을 넣어 냉장 숙성하면 된다. 더 오래 두고 먹을 것은 소금 양을 더 늘려서 숙성시킨다. 맛을 잘 내고 싶을 때는 멸치액젓이나 까나리액젓을 조금 섞어 넣어도 좋다. 날것을 그대로 끓이면 냄새가 이상한데, 젓을 담근 것은 괜찮아서 된장찌개 등에 넣기도 한다. 이른 멍게를 먹고 나니, 날씨가 이미 수상하다. 봄은, 벚꽃도 피지 않았는데 이미 물러갈 채비를 하는 것일까.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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