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봄에 먹는 일

남도에는 계절이 일찍 들었다. 꽃의 잔치가 시작되었다. 겨울 꽃인 동백과 매화가 여전한데 개나리가 노란 잎을 피워냈다. 남쪽에서 온 훈풍이 볼을 간질인다. 남쪽 바다는 잔잔하게 일렁이며 부드럽게 몸을 낮췄다. 하얀 부표를 띄운 바다는 안쪽에서 무럭무럭 무언가 생물을 키워내고 있다.

언젠가부터 시중의 미식가들이 계절의 별미로 챙기는 도다리쑥국 한 그릇을 받았다. 이 국은 통영이 유명하지만 남도의 많은 지역에서 먹는 봄의 시식(時食)이다. 남해와 삼천포, 고성, 창원에서도 잘하는 집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겨우내 바람 흠뻑 맞고 자란 여린 쑥이 도다리 뼈가 풀어낸 달콤한 국물에 녹아 있다. 한 숟갈, 국물을 뜬다. 바싹 마른 논에 첫 물꼬를 열 듯, 몸이 활짝 열린다.

천천히 젖어드는 몸을 느낀다. 온갖 자극적인 음식과 공장에서 만든 재료로 이루어지는 음식에 녹아나는 내 몸이 놀라는 것이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 도다리를 사서 국 끓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겠다. 그렇다면 넙치를 쓰면 된다. 적당한 1㎏짜리 한 마리로 한 냄비를 끓일 수 있다. 아니면 알싸한 봄 조개의 맛을 보라. 춘원이 그랬던가. “모시조개와 산나물이 밥상에 오르면 봄이 온 것을 안다”고. 모시조개든 바지락이든 한 사발 넣고, 시장에 나온 쑥 두어 줌으로 끓이면 된다. 마늘은 약하게, 파도 조금, 청양고추는 빼거나 넣더라도 조금. 소금 간은 거의 하지 않고 순하게 끓여서 조개의 감칠맛과 쑥의 향을 살려내는 게 중요하다. 찌개 두부도 좋은 친구다. 반 모쯤 썰어 넣어 맛을 조화롭게 만들어낸다. 겨우내 지친 몸에 기운을 불어넣는 음식이 될 것이다. 쑥버무리도 만들고 쑥떡도 눌러 먹는다면 더 좋겠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하는 말인데, 지금 굴은 아주 농밀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초여름에 종패를 붙여서 바다에서 오랜 시간 자란 시점이라 알이 굵고 진하다. 생굴보다 찜으로 먹을 때 진가를 발휘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굴이 가지고 있는 영양분은 봄에 필요한 에너지를 준다. 이즈음이 굴이 시장에 나오는 마지막 철이다. 아니면 겨울까지 굴을 기다려야 한다. 굴 좋아하는 이는 끝물 굴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겠다.

맏물이라면 주꾸미는 어떤가. 비싸도 제값을 하는 제철 음식이다. 올해 어황이 어떨지 모르지만, 주꾸미가 귀한 몸이 된 지 오래다. 그래도 그 쫄깃하고 찰싹 붙는 맛을 지나치기에는 아쉽다. 무리해서라도 서해 쪽으로 차를 몰거나, 시장에서 사서 요리해 보시기를. 집에서도 간단히 산지에서 유행하는 ‘샤브샤브(토렴)’를 할 수 있다. 맛있게 하는 한 가지 요령은, 국물을 낼 때 콩나물과 무, 약간의 바지락을 쓰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국물을 끓여서 주꾸미를 넣어 토렴하면 된다. 먹물이 터져서 검게 변한 육수에 라면이나 칼국수를 넣어 먹는 것이 이 요리의 방점을 찍는 일. 후룩후룩, 국수 넘기는 소리에 진짜 봄이 내 곁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는 사이 끈질기게 따스한 바람을 기다리던 벚꽃이 하나둘 피어날 것이고.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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