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선술집 순라길

어렸을 때 서울 종로 낙원동 근처는 정말 ‘낙원’이었다. 근처 파고다공원에서 소일하던 할아버지들 틈에서 해장국 한 그릇을 싸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난 집’ ‘이름난 집’이라고 해서, 어쩌면 정식 상호도 아니었을 두 해장국의 맹주가 있었다. 깍두기 양념이 얕고 국맛도 대단한 건 아니었다. 바로 값이었다. 헐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아니 이렇게 받고도 가게가 굴러가?” 뭐 이런 반응들. 거기 오는 이들에게는 묵직한 가격일 수도 있었겠지만. 파고다공원은 이미 구한말 이후에 노인들의 주요 휴식 공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가벼운 주머니에 한 그릇 끼니를 해결해야 하고, 그 수요는 주변에 싼 밥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에 명동과 을지로, 충무로를 일인들에게 내준 민족의 시장터가 종로였다. 여기서 고유음식인 설렁탕과 해장국이 명색을 이어갔다.

낙원동을 지나 순라길 쪽으로 넘어간다. 정식 명칭은 돈화문길이고, 속칭은 담벼락길이다. 종묘의 높다란 담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기에는 그냥 순라길이 더 익숙하다. 조선조 순라꾼들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야경을 했던 그 길인데, 서울방범센터라고 할 순라청이 있었다고 한다. 피맛골은 이미 재개발의 삽날을 받았지만 종묘를 둘러싼 옛 공간은 아직 건재하다. 예전에 김현옥 전 시장이 사창가였던 ‘종삼’을 헐어버린 후 큰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일대에 노인들이 많이 모이고 노는 것은 지역적으로 옛 정취가 흐릿하게 건재하다는 점, 싼 밥집과 술집이 남아 있다는 점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술과 밥을 먹는 방식이다. 조선 말, 기록을 보면 서서 먹는 선술집과 나무판자를 깔고 앉는 목로주점이 꽤 많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이런 술집이 종로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선술집이든 목로든 일단 간이음식을 판다. 특히 이미 만들어놓은 요리를 진열해두고 그대로 먹거나, 데워서 내는 게 중요한 특징이다. 서울에서 이런 집들은 자취를 거의 감추었다. 이곳 순라꾼길만 빼놓고 말이다. ‘뚱순이네’를 비롯한 선술 목로집이 성업한다. 내 또래는 거의 발길을 들이기 어렵다.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 가득 ‘서서’ 술잔을 비우고 있기 때문이다.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노인들이 오히려 들어오라고 성화다.

이런 집의 묘미는 잔술이다. 막걸리 1000원, 소주도 1000원이다. 맥주는 가스가 날아가니 잔술이 없다. 묵묵히 서서, 노인들의 옛이야기를 들으며 선술집의 맛을 즐겨본다. 국수와 수제비가 3000원이고 봉지커피는 달랑 300원. 이것이 스러져가는 종로 뒷골목의 경제수준을 말해준다. 서울의 마지막 선술집, 그야말로 서서 먹는 이 전통의 술집이 사라지기 전에 한번 들러보시길 바란다. 발길을 대각사 쪽으로 돌려 들어가면 4000원짜리 한상 백반에 조기새끼 구이도 나오는 곳이 있다. 상호도 없이, 그저 ‘닭곰탕’이라고 붙여놓은 집이다. ‘육육김밥’을 지나 ‘홍매찻집’을 지나니, 유명한 익선동길이다. 그렇게 종로3가 안쪽의 유적 같은 세상을 보았다. 가려진 길과 공간, 막걸리 색깔처럼 눈앞이 뿌옇게 보인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에 먹는 일  (0) 2016.03.24
식어버린 ‘한우 사골’  (0) 2016.03.17
참치눈물주  (0) 2016.03.03
김해 돼지국밥  (0) 2016.02.25
혼밥·혼술, 되돌리고 싶은 현실  (0) 2016.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