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용재의 건축과 음식 사이

벽 답지 못한 벽

'벽’이라는 단어에 어떤 이미지, 또는 느낌이 떠오르는가? 우리가 늘 접하고 사는 그, 물리적인 벽을 바로 생각하기란 의외로 쉽지 않다. 부정적인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사전을 찾아보자.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나 장애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넘사벽’이라는 유행어가 생각난다. 아니면 ‘관계가 교류의 단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도 한다. 냉전시대의 벽,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과 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벽은 갈라놓는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가 언제나 붙어 다닌다.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한탄하는 노래 가사도 있듯, 벽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재질보다는 존재감 그 자체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벽이 갈라놓지 않으면 공간도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한다. 학부시절 읽었던 건축 이론책이 생각난다. 오래전 일이라 제목도 저자도, 또한 어떤 내용을 다루었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책을 번역한 것이었는데, ‘벽도 벽이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공간에 진짜 의미가 있다’와 비슷한 구절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언제나 공간에 쪼들리는 우리에게 사실 벽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 쪼들리는 공간 안에서 쥐꼬리만한 사생활을 보장해주는 건 벽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시대는 그 정도의 벽으로 사생활을 지키기에 너무 복잡하다. 게다가 대부분의 벽은 얄팍해서 시각적인 차단으로 체면치레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재질은 물론 존재 면에서도 그렇다. 잘 지어 놓았다는 아파트에서도 새벽, 윗집 변기 물 내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옆집에서 붙박이장의 문을 세게 닫으면, 그 맞은 편 벽에 책상을 놓고 일하는 내가 다 깜짝 놀라게 된다. 남의 사생활을 듣게 되는 것도 불편하지만, 그만큼의 나의 사생활도 드러날 것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더 불편해진다. 이렇게 벽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단지 제 역할을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벽을 학대한다. 면벽수도(面壁修道)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얼굴을 벽에 대고 도를 닦는다는 불교 용어다. 물론 불자들의 수행방법이니 속인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정말 면벽수도를 원하는 불자들이라면 절에 좋은 벽들이 많이 있을 테니 속세의 벽까지 딱히 신경 쓸 필요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벽이 지니고 있는 단절감, 또는 침묵이 면벽수도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정도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요즘 우리의 벽은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가 없다. 사람들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여지만 있어도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또는 말을 집어넣으려고 안달한다. 



내가 사는 오산의 벽은 모 문인협회가 장악하고 있다. 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대합실의 공간을 이들의 시화 액자가 가득 메우고 있다. 물론 이 자리를 빌려 작품성을 논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그건 내 소관 밖이다. 다만, 눈을 돌리는 곳마다 있기 때문에 정말 눈을 감아버리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생각을 끊임없이 봐야만 하는 상황은 괴롭다. 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건 단지 이렇게 넓은 벽만이 아니다. 화장실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소변기에 섰을 때 바로 눈앞에 있는 벽에도 “작품”을 붙여 놓았다. 생물학적으로 시선이 거의 고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변을 보는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순간에도 뭔가 생각하기가, 아니면 아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기가 너무 힘들다. 주입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오산의 공공기관 화장실은 대부분 이렇게 접수되어 있다.

물론 모 문인협회를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은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말들, 그러니까 온갖 ‘훈장질’을 비롯한 경구들은 산지사방에 널려 있다. 특히 지하철역은 그런 말들의 전시장이다. 일단 종교적인 가르침에 기댄 일화나 우화 등등을 담은 액자들이 널려 있다. 참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물론 찬찬히 읽어보면 좋은 말들도 많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러한 말, 또는 이야기들이 주는 가르침이 없어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돌아가는 건 아니다. 너무 많다 보니 정말 뭔가 주고 싶어서 그런 말들을 내 건 것인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어서 그런 것인지 이제는 그것도 분간할 수 없어졌다. 


안전을 위해 플랫폼에 벽을 설치하자, 지하철역에는 이제 더 많은 말들이 들어섰다. 일단 벽=광고이므로 온갖 반짝거리는 광고들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 광고=돈이므로 오히려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보기 좋다는 건 아니다. 너무 반짝거리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돈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불편함을 감수해주겠다는 말이다. 그러나 광고가 들어서고 남은 유리벽까지 시로 채우고 나니 또한 어디로도 눈을 돌릴 수가 없어진다. 대부분의 시들을 보면 각박한 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을 달래주고 싶다는 아량으로 가득하나, 오히려 그 시의 존재 때문에 더 피곤해진다. 

물론 도시에 살면서 면벽수도 같은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나도 다른 도시인들처럼 바쁘게 산다. 아니,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오감을 언제나 열어놓고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든 무차별적으로 흡수하면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때로 닫아둘 필요도 있고, 침묵을 지켜야 할 필요도 있으며,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벽이 필요하다. 자발적인 고립을 보장해줄 벽도 필요하고, 면벽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어 있기 때문에 편안한, 그런 벽도 필요하다. 한마디로 벽다운 벽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벽을 벽답게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존재 또는 말에 대한 강박관념이 벽을 가득 메워 버렸다. 채우기는 쉽지만 비우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제는 채울만한 여지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침묵을 지킬 수 없는 벽을 자꾸 세워봐야 우리는 유사고립상태에 더 빠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