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아끼는 식재료, 배추·대파

내게 아끼는 식재료가 뭐냐고 묻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이탈리아식을 하니까 푸아그라나 멋진 올리브오일, 최고 등급의 쇠고기를 먼저 떠올리는 모양이다. 죄송하게도 나의 숨겨진 맛 재료는 평범한 것들이다. 우선 이 계절이라면 대파와 쪽파다. 요즘의 파는 감칠맛이 제대로 실린다. 얼마 전에 어린 학생들에게 고기를 구워준 일이 있었는데, 대파를 아무 양념 없이 불에 구워냈다. 파라면 질색을 하는 아이들이 한 조각 먹어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파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어요!” 대파에 기름을 발라 그냥 가스불이나 숯, 연탄불에 구우면 된다. 달콤하고 진한 맛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고기 구울 때 늘 곁들이는 감자와 양파 말고 대파를 얹어보시라. 대파 한 단 값은 정말 서운할 정도로 싸다. 양식(洋食) 만들 때 쓰는 재료는 아니지만, 갈치속젓은 고기와 궁합이 정말 좋다. 느끼한 삼겹살과 목살도 이 녀석만 만나면 입에 쩍쩍 붙는다. 갈치속젓의 감칠맛은 정말 대단하다. 이걸 넣고 밥을 비벼도 끝내준다. 고명으로는 삶은 배추를 된장에 버무려 얹으면 환상이다.

 

 

(경향DB)

 

다음으로는 배추다. 시원한 국물을 내는 데 계절 배추만 한 게 없다. 슬쩍 끓여도 시원하고 달콤한 국물을 내준다. 라면을 끓일 때 배추 한 줌을 넣어보시라. 국물의 격(?)이 달라진다. 감칠맛이 살살 돌아서 미원 넣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한 통에 천 원밖에 안 하는 요즘 배추 값이 원통할 정도로, 배추는 아주 훌륭한 조미료다.

 

배추보다 먼저 맛이 드는 ‘친구’가 있다. 무다. 근교의 밭에 가니 푸르게 잎을 피워 올린 무가 살지고 탐스러워 보이는 연둣빛 몸통을 흙 밖으로 반쯤 내밀고 있었다. 이제 수확해달라는 뜻이다. 이 계절에는 무 하나만으로 국물 맛의 절반을 해결한다. 날씨도 쌀쌀한데 무를 숭덩숭덩 썰어넣고 시원한 동탯국을 끓여보고 싶다. 소 사골 국물도 한다하는 요리사의 비밀 양념이다. 사골을 푹 고아서 농축해 두었다가 국이나 찌개를 끓이거나 서양식 소스에 넣으면 맛의 깊이가 달라진다. 스테이크 소스 맛의 비밀은 바로 사골국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새 한우 사골 값이 바닥이다. 말만 잘하면 거저(?) 줄 기세다. 시간이 된다면, 땀 흘리며 사골을 한번 고아보면 어떨까.

 

음식의 맛은 대개 감칠맛과 지방이 크게 관여한다. 당신의 불고기가 맛이 없다면 지방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일 확률이 높다. 버터는 기름처럼 지방인데, 서양요리든 한국식이든 부족한 맛을 보태는 데 도움을 준다. 나 같은 서양 요리사에겐 버터가 긴요한 양념이다. 버터가 없었다면 현재의 서양요리는 절반쯤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곰곰 생각하니, 맛이란 결국 계절이 주는 선물 같다. 인간이 아무리 분석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낸들, 계절이 살찌우는 맛의 부피는 따라갈 수 없다. 숨겨진 맛의 비밀이란 결국은 계절의 은혜를 얻는 능력인 셈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믿음이 더욱 굳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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