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간장과 깃코만 사이

우리 맛의 비결은 흔히 장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보다 장 문화가 월등히 발달했다고들 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여부를 떠나 한국인은 장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근래 20~30년간 외래 음식의 급속한 수용이 있었다. 마요네즈와 케첩이 부엌의 필수(?) 양념이 되었다. 와사비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일은 흔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장으로 우리 음식의 표정을 만들어간다. 뜨끈한 된장찌개와 쌈장에 풋고추를 곁들이고, 고추장 얹은 비빔밥에 간장으로 볶은 반찬도 다 장(醬)이 들어간다. 간장에 절이고 삭힌 장아찌는 물론이다. 감칠맛은 음식의 맛을 끌어올리는 일등 재료다. 감칠맛이 많이 나는 고기가 귀해서 우리 조상은 대신에 콩으로 맛을 냈다. 콩이 고기처럼 감칠맛을 낸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장이 세계시장에서 대접받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한때 유럽에서 살았는데, 한국에서 왔다니까 현지인이 “미소 알지?”하며 반가워했다. 그는 일본 된장 애호가였다. 그는 간장도 좋아했는데 아예 ‘깃코만’이라고 불렀다. 미소란 물론 일본에서 된장을 이르는 말이다. 깃코만은 상품명이 추상명사가 된 경우다. 그에게 한국 것은 미소가 아니라 ‘된장’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고쳐 주었지만, 그가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소라는 말이 이미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유일한 된장의 이름이다시피 한 상황이다. 이러다가는 된장은 ‘코리안 미소’, 간장은 ‘코리안 깃코만’이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실제로 그게 대세가 되고 있다. 효율적인 상품 소개를 위해서 그러는 경우도 있다).

 

 

(경향DB)

 

한국이 우물쭈물하고 있는 동안, 장의 독자적 이름을 확실히 일본식이 장악하고 있다. 그걸 뭐라 할 건 못된다. 우리 스스로 장을 제대로 알릴 기회를 걷어차고 있었던 까닭이다. 얼마 전 문제가 되었던, 미국에서 한식을 소개한 광고가 그 한 예다. 고추장은 그냥 고추장이지 그 무엇도 아니다. 그 광고에서처럼 ‘레드 핫 페퍼 페이스트’라고 부르면 맛은 고추장 맛인지 몰라도 진짜 고추장이 될 수 없다. 스시라고 부르지 않고 ‘로 피시 온 더 라이스’ 따위로 불렀다면, 오늘날 서양에서 스시의 위상이 있었을까. 명명과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일본인들은 스시를 시종 스시라고 부름으로써 스시다운 맛과 형태를 팔아먹을 수 있었다.

 

샘표식품이라는 기업이 우리 장을 가지고 현대적 맛의 본고장인 유럽에 진출했다. 그들이 유럽 미식의 거대 전시장인 ‘마드리드 퓨전’ 같은 행사에 장을 들고 나가서 맛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하든 고추장, 간장, 된장이라고 정확히 이름을 붙여 홍보했다는 점이다. 이 행사를 보도한 방송 인터뷰에는 현지 유명 요리사와 저널리스트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또렷하게 “된장, 고추장”이라고 발음하는 걸 들으며 전율한 것은 나만의 ‘오버’였을까. 코리안 미소와 코리안 깃코만이라는 수동적이고 뭔가 열등한 표현을 버린 데서 나오는 통쾌함이었다. 더 늦기 전에 된장, 간장, 고추장이 명확하게 세계시장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을까. 다행인 건, 누군가 그렇게 부르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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