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임종 음식

연말은 요리사들에게 최악(?)의 시기다. 거의 휴무도 없이 크게 늘어난 손님을 맞는다. 그걸 이쪽 세계에선 ‘쳐낸다’고 표현한다. 겨우겨우 힘겹게 일을 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요리사 일을 하면, 제일 불편한 것이 친구들과 술 한 잔 나누는 일이다. 퇴근 후 모임에 가면 파장 무렵이니, 흥이 따로 놀아서 어색하다. 게다가 배는 고픈데, 녀석들은 상을 물리고 가볍게 맥주나 마시려고 든다. 끝난 상에 앉아 삼겹살 일인분을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늦은 술자리를 찾아가는 대신, 한가한 낮에 몇몇 친구들과 만나 시내 식당에 간다.

 

 

(경향DB)

 

대개 우리 식당들은 밤에는 직장인 대상으로 술을 팔고, 점심시간에는 밥을 팔아 운영한다. 재미있는 것은, 시내의 유명한 노포들에서는 독특한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시간대에 의미 있는 손님들이 찾아든다. 머리가 허연 은퇴 노인들이다. 동창회도 있고, 향우회도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둘러앉아 탕 같은 음식에 소주를 돌린다. 점심은 요리값도 싸고, 자리가 한적해서 일부러 찾는 듯하다. 나는 이런 시간대에 그들과 나란히 앉아 음식 먹는 일이 좋다. 묵직한 어른들과, 겸상은 아니지만, 더운 김이 솟는 음식을 한 공간에서 나눈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한때 미워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작은 친근감이 피어난다. 나도 이젠 나이가 들어간다는 뜻이겠다. 깔끔한 식당보다 오래되어 낡은 식당, 간판에 가게의 내력이 스며 있는 술집, 노란 딱지의 ‘두꺼비’ 소주가 탁자에 올라 있는 듯한 착각을 주는 대폿집, 그리고 금세라도 아버지가 친구들과 허허 웃으며 들이닥칠 것 같은 그런 실비집….

 

충무로 옛 명보극장 앞 골목에 스무 명이나 겨우 들어갈 작은 식당이 있다. 튀긴 양념 코다리가 맛있는 이 집에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곱게 늙은 여주인이 혼자 온 한 노인을 맞았다. 이런저런 요리를 권하는 모습이 푸근했다. 요새 누가 단돈 오천원짜리 식당에서 이런 따뜻한 권유를 받아보았는가.

 

“날씨가 추운데 뜨끈한 동태찌개 어떠슈?”

 

임종 음식이라는 말이 있다. 유행어로 솔푸드의 한 종류라고 해도 될 것이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은 음식을 이른다. 오장동의 함흥냉면집들이나 평양식 냉면집들, 불고기를 파는 식당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다. 대개 서울 강북의 노포에서 종종 그런 광경을 목도한다. 부축을 받거나 휠체어를 탄 노인이 자식들의 부축을 받아 아마도 지상 최후의 외식이 될 음식을 받는 장면이다. 외식할 근력조차 없어지면, 그들은 힘들게 살아낸 한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내 숟가락질도 느려지고, 마음은 경건해진다. 우리는 먹기 위해서 태어났고, 곡기를 끊음으로써 숨도 놓게 된다. 한 삶의 퇴장에 바치는 한 그릇의 음식이 주는 비장함! 곁에 앉아서 시중드는 자식들의 애틋한 표정을 읽으면서 나는 삶이란 무엇인가 곱씹어보곤 한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피맛골의 애환  (0) 2013.12.13
문학 속의 음식  (0) 2013.12.06
예약  (0) 2013.11.22
간장과 깃코만 사이  (0) 2013.11.15
아끼는 식재료, 배추·대파  (0) 2013.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