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알고보니 중국배추

총각무가 시장에 나온 걸 보니 침이 고인다. 잘 익은 총각김치 하나에 뜨거운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싶다. 둥근 머리부분을 통째로 씹을 때 아삭한 식감이란! 나 같은 경우는 무청도 아주 좋아해서 뜨거운 밥에 휘휘 비비듯 섞어서 입에 넣는 걸 좋아한다. 간이 잘 밴 무청이 약간 질깃하게 씹히는 것이 좋다. 하얀 쌀밥이 입천장을 뜨겁게 달구고 거기 다시 총각김치 양념의 자극이 전해지는 걸 즐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그릇이 비곤 했다. 무는 시월부터 제철이 되는 듯하고, 배추는 아직 이르다. 그래도 차가운 바람이 깃을 스칠 때 우리는 배추김치, 즉 김장을 생각하게 된다. 김장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배추다. 차곡차곡 소금 먹여서 절인 배추가 커다란 소쿠리나 채반에 쌓여 있고, 고춧가루의 알싸한 향과 젓갈의 진한 냄새가 코끝에 닿는 듯하다. 무엇보다 어머니의 분주한 손놀림을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다. 배춧잎 사이사이 양념을 비벼 넣는 어머니의 재빠른 손이란!


우리는 배추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 같다. 중국의 소동파가 배추를 좋아해서 돼지고기에 함께 넣어서 동파육이니 동파채니 하는 걸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한민족이 배추를 가장 즐기는 것 같다. 일본의 소설가 가쿠타 마쓰요가 그녀의 아버지대에 배추김치를 담가 먹었다고 글을 써놓은 걸 보면 일본도 꽤 배추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배추는 한반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존재가 됐다. 회사에서 배추를 사라고 (김장)보너스를 주는 나라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지금 우리가 먹는 배추는 중국배추(호배추)란다. 이 배추가 널리 퍼진 건 1960년대의 일이다. 주영하 선생이 최근 펴낸 <식탁 위의 한국사>를 보면, 일제시대에 처음 우리땅에서 재배하기 시작한 중국배추가 조선배추를 대체하게 된 과정이 드라마틱하게 나와 있다. 우리 배추가 따로 있었어? 놀라운 일이다. 중국배추란 이른바 결구배추라고 하여 속이 꽉 찬, 촘촘히 잎이 박혀 있는 보통 배추를 뜻한다. 조선배추는 속이 비어 있어서 반결구배추라고 부른다. 통이 좁고 가볍다. 일제 때 기록에는 조선의 배추는 개성과 경성 배추가 최고였다. 개성 것은 북쪽에서 많이 심고, 한강 이남에서는 경성배추가 대세였다. 우리가 음식에서 민족적 전통이라고 믿었던 것이 기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경우가 흔하다. 우리는 참으로 역동적인 역사를 가졌던 것이다. 한민족 식생활의 상징인 김장의 배추조차 도입된 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니 말이다.


최근 우리것 찾기 바람이 불어서인지 종의 다양성을 즐기려는 시도인지 조선배추를 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놀랍게도 인터넷에서 쉽게 조선배추 씨앗을 살 수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 조선배추로 담근, 그것도 고추가 전래되기 전의 요리법대로 하얀 백김치를 한번 담가 먹어보고 싶다. 아니면 선조들이 종종 즐겼다는 간장 배추김치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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