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대구 종로의 ‘진짜’ 중국음식

고종 19년(1882년) 6월9일, 임오군란이 터지자 청나라는 3000여 명의 군대를 이 땅에 파견했다. 이때 약 40여 명의 민간인이 함께 들어왔다. 공식적으로 한국에 화교가 생겨나게 된 계기다. 이후 인천을 중심으로 서울로 발을 넓혀서 이주민의 숫자가 크게 늘었다. 1931년 만주에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충돌한 만보산 사건, 해방과 중국 공산화에 따른 왕래 제약,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서의 노골적인 차별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략 현재 화교 숫자는 2만 명을 조금 웃도는 선. 알다시피 상당수가 식당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탕탕, 반죽을 내리치던 수타면의 육중한 타격음과 알아들을 수 없는 왕서방의 주문(注文)이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물론 이제 그런 중국집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회가 있어 대구의 음식을 취재하면서 화교 식당을 여럿 찾아 맛보았다. 대구는 한때 화교 상권이 발달했고, 지금도 대구 외식업의 중추로 자리잡고 있다. 특이한 것은 다른 대도시의 중식당들처럼 퓨전화되거나 한국식으로 동화되지 않고 근대의 음식문화를 상당수 지켜가고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적산가옥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종로(대구에도 종로가 있다)를 걷노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일제시대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이는데, 이 근처에 깜짝 놀랄 만한 중식당들이 건재하다.


만두를 뜻하는 교자의 중국어 발음을 살린 ‘찐교스’와 일제 때 전래된 오리지널 하얀 짬뽕을 닮은 ‘할배짬뽕’, ‘야키만두’와 ‘야키우동’이 잘 팔린다.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근대의 오래된 중국음식이다. 심지어 화교 전래 초기에 개항지인 인천과 경성에서 시작된 계란빵과 센빙(중식 호떡)까지 그대로 팔리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경향DB)

 

대구의 중식당 주방에서 묵묵히 궈(볶음냄비)를 돌리던 유장산씨(청보석 주방장)는 화교 2세로 파란만장한 추억을 가지고 있다. 그의 팔뚝은 온통 붉은 상처로 가득하다. 기름이 튀어 생긴, 중식 요리사의 훈장 같은 상처다. 과거, 그는 여권을 갱신하러 들른 관청에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가 가지고 있던 ‘F2비자’가 바로 난민 지위에 해당한다는 것. 한국에서 태어나 쭉 살아오고, 세금을 착실히 냈던 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무너뜨리는 당국의 처사였다고 그는 기억한다. 두 번의 화폐개혁으로 부동산을 취득하기 힘들었던 화교들의 재산권이 심각하게 무너지고, 취업이나 결혼에도 차별받던 그들 ‘유민’의 역사가 떠오른다. 그가 만들어준 그 시절의 인기요리는 이제 화석화되어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서울~대구간 고속열차로 불과 2시간 미만. 우리는 그 짧은 시간에 전혀 색다른 시공간의 이동을 경험하게 된다. 대구 구도심의 오랜 정체는 오히려 ‘근대성’을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됐다. 아이들에게는 우리의 역사를 직접 보는 기회를, 어른들에게는 추억어린 거리 풍경과 ‘진짜’ 중국음식을 맛볼 수 있는 값진 여행이 될 듯하다. 아직도 전통시장의 수수한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서문시장의 칼국수와 칠성시장의 돼지껍데기 연탄불구이, 대구가 원조인 육개장까지 맛본다면 짧은 여행이 더 즐거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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