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얼음의 시절

얼음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얼음가게는 멀었다. 그래도 어머니가 사오라고 시키면 한달음에 날아갔다. 얼음가게 가는 길은 완연한 여름이었다. 식당들은 ‘냉면개시’라고 써 놓은 붉은 깃발을 내걸고 손님을 끌었다. 복날의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남자들의 눈빛이 수상해지던(?) 시절이기도 했다. 얼음가게는 꼭 석유 판매와 겸업이었다. 우산과 소금을 같이 파는 격이랄까. 여담이지만, 이 냉온 겸업의 역사는 한번 취재해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얼음을 사러 가는 게 좋았던 건 시원한 얼음창고 때문이었다. 얼음가게가 학교 동무네였던 것이다. 아저씨는 기꺼이 창고에 나를 들여보내주었다. 딱 뭐랄까, 차가운 얼음의 기운이 피부에 닿으며 좁쌀만 한 소름이 쫙 끼쳤다. 그 기묘한 기분을 즐겼다. 아저씨는 쇠갈고리로 푹, 얼음을 찍어서 커다란 톱으로 슥삭슥삭 썰었다. 얼마 치라고? 네 50원이요. 아저씨는 말도 없이 얼음톱밥을 하얗게 일으켰다. 나는 그걸 손에 쥐고 동그랗게 말았다. 까만 땟국이 손에서 줄줄 흘렀다. 아저씨는 커다랗게 썰어낸 얼음을 새끼줄로 묶어 쥐여주었다. 덤으로 넉넉하게 썬 얼음은 제법 무거웠다. 조심해 가라. 최대한 빨리 집에 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얼음이 녹아서 새끼줄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동네 식당에서 만드는 냉면은 좀 엉터리였다. 육수를 내기 힘드니까 대충 미묘한 국물로 맛을 냈다. 거기에다 커다랗게 부순 얼음을 둥둥 띄우는 것으로 손님을 끌었다. 다 먹어도 그릇에 남아 있던 빙산처럼 생긴 부정형의 얼음덩어리. 제철인 토마토를 두어 점 크게 썰어 넣고 엉터리 냉면을 먹었던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냉면 먹으러 다녔다. 당시는 어른 아이 음식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3학년만 되면 짜장면 곱빼기를 먹어대던 시절이었다. 왜?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까. 믿지 못하겠지만 초등학교 앞에 해삼, 멍게, 통굴 리어카가 와서 아이들을 유혹하기도 했다. 그때는 왜 그게 그렇게 쌌을까. 어쨌든 냉면 먹으러 가는 곳은 황학동이었다. 





을지로 우래옥이나 종로 한일관에 가면 맛있는 냉면이 있었지만 중학생 용돈으로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고르는 곳이 중고풍물시장(그때는 개미시장이라고 불렀다)이었다. 시장 한쪽에 리어카가 죽 이어져 있는데, 저녁에는 돼지내장볶음에 소주를 팔았고 낮에는 냉면과 열무국수를 말았다. 냉면값이 1979년도 정도에 150원인가 했다. 그걸 먹으려고 용돈을 아꼈다. 500원을 가져가면 ‘빽판’이라고 부르던 해적판을 하나 사고, 냉면도 먹었다. 산더미처럼 말아주는 냉면의 맛은 시고 달았다.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아예 설탕을 한 숟갈 얹어주었다. 거기에도 빙산처럼 뾰족하게 부순 얼음덩어리가 올려져 있었다. 면을 다 먹고 얼음을 입에 넣고 깨물면서 황학동 거리를 걷던 여유로운 낭만이 있었다. 경찰이 호각을 불면서 물건 처분하러 나온 좀도둑을 쫓고, 아이들이 그 뒤를 무리지어 달려가던 한여름, 찌던 낮의 추억이다.


우리집 냉장고는 얼음이 없다. 무더운 밤을 달래주던 돗자리도 없다. 탈탈거리며 돌아가던 금성사 선풍기도 없다. 여름은 냉방에 밀려 거리로 쫓겨났다. 다들 얼음처럼 차가운 커피숍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먼눈으로 거리의 여름을 볼 뿐이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