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프랑스서 만난 국산 우엉조림캔

한식의 위상이 달라지기는 하는 모양이다. 유명한 식당가이드인 <기드 미슐랭> 등에 미국과 일본의 한식당이 근자에 연속으로 최고 식당의 상징인 별을 얻었다. 그저 불고기와 김치 정도로 알려져 있던 한식의 다른 얼굴을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위상 변화가 매우 구체적인 건 아니다. 여전히 한식은 중식과 일식, 동남아식의 한 변방 정도로 취급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촌 구석구석의 저변에 한식을 알고 사랑하는 기운이 번지고 있는 것도 맞다.

최근 프랑스의 한 작은 도시에 들른 적 있다. 공원에서 젊은이들이 맥주 안주로 먹고 있는 음식이 눈에 띄었다. 캔에 든 즉석식품인데, 웬일인지 낯이 익었다. 캔 표면에 한글이 써 있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1만㎞는 떨어진 이방에서 한국식품을 먹고 있는 현지인들이라니. ‘우엉조림’이라는 선명한 한글이 묘한 기분을 불러왔다. 내가 신기하게 보자 엄지를 척 올리며 ‘세봉’(맛있어)을 외쳤다. 한 이국인에 대한 예의라기보다, 제법 맛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캔 뚜껑을 따자마자 금세 우엉조림이 동이 났으니까 말이다. 젓가락도 없이 맨손으로 우엉을 집어먹으며 그들은 신나게 생맥주를 마셨다. 그런데 더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옆에서 다른 일행이 역시 생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맙소사! 안주가 한국의 포장 김이었던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아는, 플라스틱으로 포장된 조미 양념 김이었으니. 거짓말 말라고 하시겠다. 이것 참,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우리 음식의 세계화(?) 현장을 너무도 생생하게 목격한 것 아니겠는가.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겪은 일부터 심상치 않았다. 우리 국적기는 모두 두 번의 정식 식사를 모두 한식으로 냈다. 첫 번째 식사는 아주 신선한 발상이었다. 깔끔하게 씻어서 예쁘게 말아 놓은 쌈 채소가 식욕을 불러왔다. 옆자리의 프랑스인이 상추 한 장을 놓고 쌈장을 발라 밥을 올려놓고 먹는 장면은 하나의 또렷한 상징이 아니었을까. 이를테면, 한식을 외국인에게 내놓을 때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던 미묘한 불안감을 더 이상 지속할 필요가 없다는 자신감 같은. 물론 이런 기분은 좀 극단적이어서 어떤 경우는 지나친 우월감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한식이 건강에 최고라는 맹목적 자신감이 그중 하나다.


여하튼 장거리 비행이니 다음 기내식이 또 있었다. 심지어 그 메뉴는 두부김치덮밥이었다. 절묘하게 발효 냄새를 조절한, 그러나 충분히 한식다운 메뉴였다. 소주 한잔을 곁들이고 싶을 정도로. 기내식의 진화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음식을 고안하고 한국인과 외국인이 두루 즐길 수 있게 요리법을 만든 요리사들에게 깊은 존경을 바칠 수 있는 음식이었다고나 할까. 길고 지루한 비행시간 동안 승객들은 충분히 음식을 즐겼다. 자, 우리가 팔 수 있는 음식은 이것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다음 기내식은 또 무엇이 나올지 기대해 보는 재미가 있지 않겠나. 순댓국과 갈비탕? 김치볶음밥과 육개장? 물론 떡볶이만 아니라면 말이다.


홍인표 국제에디터 iph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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