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용재의 건축과 음식 사이

정말 배웠는지 믿기 어려운,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건축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매튜 프레데릭 글, 그림 /
국내 번역출판 동녁


어느 캠퍼스 드라마에서, 꽃미남 주인공이 건축과 학생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문에 90년대 초중반에 건축과의 경쟁률이 높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있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기억하기로 그때 건축과의 경쟁률은 정말 높았다. 1년 후배들의 경쟁률은 5대1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이과에서 건축과는 의대 다음으로 높은 점수가 필요한 과였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가서 무엇을 배웠더라? 이 책, <건축학교에서 배우는 101가지>를 펴놓고 대학시절을 복기할라치면 한숨부터 나온다. 저자가 배웠노라고 말하는 101가지 가운데 적어도 절반 정도는, 대학에서 배운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 건축과에 발을 디뎠을 때, 윗학년 선배들과 친하거나 사무실 같은 곳에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회사에 들어가면 연필 깎는 것부터 다시 배운다”라는 자조스러운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실무를 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아직도 완전하게 전산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손으로 도면을 많이 그리던 시절이었다.

대학원까지 다니고 나서 회사에 들어가 보니, 그 말이 절반은 맞고 또 절반은 틀리다는 걸 몸소 느낄 수 있었다. 늘어놓기도 벅차도록 많은 요소들이 있지만, 일단 학교에서 배우는 디자인의 단계는 실제 건물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단계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까지만 아우른다. 그 뒷부분 또한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 범위나 중요함을 생각해본다면 그저 맛보기라고 말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회사에서 과업을 수행하는 것과 배우는 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직종은 모르겠지만, 건축에서는 그 분리된 두 가지를 동시에 수행해야만 최소한 남들 하는 만큼은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느냐면,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학교라는 환경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너무나 빤한 이야기기는 하지만, 학교에서는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주 큰 그림을 보자면, 건축은 어떤 고유의 상황에 특수해를 제공하는 서비스 산업이다. 그리고 그 특수해를 제공하는데 가장 중요한 건, 상충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의 존재를 전부 염두에 두고 조정하는 능력이다. 학교에서야 어차피 짓지 않을 건물이라고 가볍게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회사에서는 화재탈출용 계단의 자리를 잡았는데 지하 3층에서 기둥의 자리와 겹친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실제로 건물을 짓는 상황에서 그런 문제가 생기면 간단하게 해결할 방법이 없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회사에서 할 일들의 바탕이며 기초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48. 할머니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용어로 아이디어를 설명할 수 없다면 다루고 싶은 주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다(If you can't explain your ideas to your grandmother in terms that she understands, you don't know your subject well enough).


이 책을 통해 내가 우리나라에서 받은 건축교육을 들여다보니 건축교육 그 자체보다 그 전제조건, 또는 바탕이나 기초로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특히 글과 말, 즉 언어를 통한 자기표현 능력의 부재가 가장 뼈아프게 다가온다. 물론 건축의 궁극적인 표현 수단이 말과 글은 아니지만, 문제해결에 필요한 생각의 씨앗을 틔우기 시작해서 결실을 보고 또 그것을 사람들-특히 의뢰인을 비롯한 건축 비전공자들-에게 왜곡 없이 전달하고 또 소통하려면 말과 글은 필수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우리는 모두 그것은 그냥 기본으로 갖추고 있거나, 없어도 괜찮거나, 아니면 각자 알아서 해결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형태적인 조형성”과 같은 표현을 쓰는 사람이 디자인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 "형상화“, ”비움으로써 채움“과 같은 표현들은 또 어떤가? 건축의 울타리에서 큰 자각 없이 쓰는 용어들의 의미를 모두들 잘 알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건축의 울타리 바깥에 있는 사람이 정말 건축과에서 무엇을 배우는지 궁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고 할 때 이 책은 궁금증을 풀어주는데 그렇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신비감만 증폭시켜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건축의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기본적인데 그렇기 때문에 놓치고 지나가는 개념들을 다시 짚고 넘어가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기다리는 5분 남짓한 시간에 커피 한 잔 마시면서 항목 한 개씩 읽거나 써 보는 정도라면 충분하겠다. 번역본도 나와 있지만, 말도 안되도록 영어를 숭상하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거쳐 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원서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