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만의 도발하는 건축

혼돈의 역학

릴 프로젝트 마스터플랜 스케치. 출처 OMA 

 

프랑스 북부에 위치한 릴은 벨기에와 인접한 국경도시다. 1970년대 번성하던 광업과 섬유 산업이 쇠퇴해 침체된 도시였다가 1983년 세계 최초의 지하 고속철도와 1993년의 TGV로 유럽 대륙과 런던을 연결하는 교차점이 된다. 불과 인구 100만명의 도시에서 5000만명의 1시간30분 거리권으로 급격히 확대돼 도시의 대개조가 이뤄진다. 변화를 수용하기 위해 약 80㏊의 거대한 철도역사, 사무실, 아파트, 호텔, 상업시설들이 필요하게 됐다. 하지만 가용지가 넉넉지 않았고 인접한 구도심의 작은 건물들과의 조화도 해결해야 할 난제였다. 무엇보다 계획에서부터 완성까지 불과 5년이라는 시간은 유럽적 시각에서 보면 드문 사례였다.
 

총괄 설계를 담당한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는 이러한 제약들에 대해 입체적 도시를 제안했다. 땅의 크기에 비해 필요 시설은 커서 자칫 주변에 위압적이거나 시설끼리 연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필지와 건축물, 기반시설을 일체화시켜 계획한 것이다. 교통 인프라를 지하에 묻고 건축물들이 서로 공중에서 연결되도록 해 마치 피라네시의 그림과도 같은 입체도시가 완성됐다.

이러한 입체화는 도시생활의 다양한 활동과 영역들이 서로 더 긴밀히 엮이도록 한다. 당연히 기존의 구획된 땅에 영역을 나눠 개별적 건물을 설계하는 방식보다 난도가 훨씬 높다. 시간적 제약에 공간적 복잡성으로 마치 악몽과도 같았을 이 프로젝트의 과정을 배후에서 기획한 장 폴 비에토 시장은 훗날 말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제약이다. 평온한 세상에선 보편적 가치가 통하지만 당시와 같은 세기말 혼돈의 시대엔 특수성이 작동한다. 릴에선 땅과 시간의 제약이 무엇보다 컸다. 두 번째는 외연적 필요가 뒤따라야 한다. TGV의 개통에 맞춰 새로운 도시가 완성돼야 한다는 강력한 필요가 수반됐다. 이 두 조건이 갖춰지면 마지막으로 혼돈의 역학을 만들 차례다. 그것은 복잡다단하게 이해관계자들이 엮이고 종속돼 서로 간 포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최종적 도달점은 보이지 않음에도 각자 임박한 부분적 의무에 의해 연쇄적으로 족쇄를 채우고 요구를 충족시키는 혼돈의 역학은 이 모든 상황들을 돌이킬 수 없이 매진시킨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일견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것의 실현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흔히 혼돈은 나쁘고 질서가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릴의 경우를 보면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혼돈이란 환경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의미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혼돈의 역학과도 같이 보다 자율적인 부분들의 관계성의 작동으로 전체 큰 그림이 완성되기도 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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