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고대 그리스 문명은 아고라에서 시작되었고, 로마제국의 중심은 포로로마노의 도시 광장이었다. 광장의 발상지인 유럽은 광장의 역사가 곧 도시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그것은 문화와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자 소통의 장소로 작용하였다. 도시 광장에서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고 통행, 회합, 교환, 상호인식의 장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장터, 문화, 예술, 의식, 집회 등으로 다채롭게 채워지는 광장은 사회적 열린 공간으로 작동한다. 이렇듯 유럽의 도시문화는 ‘광장’에 집중된 한편으로 그들의 ‘길’은 사회적 소통이나 생활 터전의 의미보다는 단순한 교통 수단에 불과하였다. 서구 도시의 고대 건축물은 석조 건물로 두껍고 높은 벽으로 건축의 내외부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벽의 외부는 상시적으로 자연의 위협이 존재하므로 길이 아닌 중정이나 광장이 공동체 생활의 터전일 수밖에 없다. 이렇듯 광장이 엄청난 의미를 갖는 서구에 비해 매력적인 광장이 전무한 우리나라에서 그것의 역할을 대신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그것은 바로 도시 곳곳에 숨겨진 골목길이다. 도시에는 고속도로도 필요하고 자동차가 다니는 길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생활공간으로서 보행 길의 네트워크이다. 고속 성장과 개발 시대에 길이란 속도를 의미하는 차들로 장악된 공간이었다. 생활 터전으로서 길이란 보행 공간과 다양한 시설들이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구성되어야 하는데, 그저 빨리 지나치게 하는 차들의 길이 차지하면서 공간은 사람이 머무는 곳이 될 수 없었다. 근래 도시별로 많은 골목길들이 차들을 밀어내고 ‘걷는 사람들’로 채워 넣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중요하다. 길은 인접한 건축물에 의해 형성되는 사회적 공간이다. 보행 길을 시민 생활공간의 연장으로서 활용하여 도시생활을 풍부하게 할 것인가는 건축가에게 늘 풀어야 할 숙제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한 두레주택은 생활 터전으로서 골목길을 내부에 품은 건축이다. 은평구의 한구석 산새마을에 자리한 두레주택은 다섯 개 방과 공동 거실을 가진 사회 초년생을 위한 자그마한 공공 임대주택이다. 담장과 내부 복도를 없애고 마을 속 굽이치는 골목길 네트워크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마치 하나의 도시와 같이 입체적인 길과 마당들을 가지고 있다. 각자 집으로 오가며 이웃 주민과 마을사람과 경계 없이 마주치고 소통할 수 있는 특이한 형식의 실험적 공동주거이다. 완고한 벽에 의한 안과 바깥의 대립을 통해 서구의 광장과 도시가 형성되었다면 우리는 안과 밖의 경계를 느슨히 하여 길이 확장되고 걷기 흥미로운 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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