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 프로젝트 마스터플랜 스케치. 출처 OMA
총괄 설계를 담당한 네덜란드의 건축가 렘 콜하스는 이러한 제약들에 대해 입체적 도시를 제안했다. 땅의 크기에 비해 필요 시설은 커서 자칫 주변에 위압적이거나 시설끼리 연계가 떨어지지 않도록 필지와 건축물, 기반시설을 일체화시켜 계획한 것이다. 교통 인프라를 지하에 묻고 건축물들이 서로 공중에서 연결되도록 해 마치 피라네시의 그림과도 같은 입체도시가 완성됐다.
이러한 입체화는 도시생활의 다양한 활동과 영역들이 서로 더 긴밀히 엮이도록 한다. 당연히 기존의 구획된 땅에 영역을 나눠 개별적 건물을 설계하는 방식보다 난도가 훨씬 높다. 시간적 제약에 공간적 복잡성으로 마치 악몽과도 같았을 이 프로젝트의 과정을 배후에서 기획한 장 폴 비에토 시장은 훗날 말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선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제약이다. 평온한 세상에선 보편적 가치가 통하지만 당시와 같은 세기말 혼돈의 시대엔 특수성이 작동한다. 릴에선 땅과 시간의 제약이 무엇보다 컸다. 두 번째는 외연적 필요가 뒤따라야 한다. TGV의 개통에 맞춰 새로운 도시가 완성돼야 한다는 강력한 필요가 수반됐다. 이 두 조건이 갖춰지면 마지막으로 혼돈의 역학을 만들 차례다. 그것은 복잡다단하게 이해관계자들이 엮이고 종속돼 서로 간 포로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최종적 도달점은 보이지 않음에도 각자 임박한 부분적 의무에 의해 연쇄적으로 족쇄를 채우고 요구를 충족시키는 혼돈의 역학은 이 모든 상황들을 돌이킬 수 없이 매진시킨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일견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것의 실현이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흔히 혼돈은 나쁘고 질서가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릴의 경우를 보면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혼돈이란 환경 변화에 대한 유연성을 의미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일일수록 혼돈의 역학과도 같이 보다 자율적인 부분들의 관계성의 작동으로 전체 큰 그림이 완성되기도 한다.
'조진만의 도발하는 건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금 중요한 집 (0) | 2021.01.07 |
---|---|
문화의 편의점 (0) | 2020.12.17 |
형태는 행위를 따른다 (0) | 2020.11.26 |
친환경의 위장술 (0) | 2020.11.05 |
광장의 도시와 길의 도시 (0) | 2020.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