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만의 도발하는 건축

친환경의 위장술

풀러의 에너지 그리드. 전 세계 재생 가능한 에너지 자원을 연결해 지구의 환경 파괴를 늦추고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삶의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총체성의 연구. 벅 민스터 풀러 연구소 제공  

건축은 존재하는 자연을 불가피하게 파괴하는 행위에서 출발한다. 고대 인류에게 자연이란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런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을 고대인들은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통해 해소했다. 그리고 자연을 대체하여 세워진 건물은 자연의 비례를 모방하고 또 식물을 모티브로 하는 장식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고대 신전의 기둥은 나무의 은유로서 다양한 형태의 잎사귀들로 꾸며졌다. 19세기 아르누보는 자연을 모티브로 각종 식물의 형태를 모방해 건축에 적용했다.

 

이후 20세기 유명한 유기적 건축 또한 이러한 계보의 연장으로 자연에 건축을 종속시키기 위한 시도였다. 20세기 후반 대부분 상업시설에 아트리움이라는 뻥 뚫린 대공간이 출현하고 다양한 종류의 식물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공간은 마치 식물이라는 산 제물을 신에게 바치기 위한 제단을 연상시킨다. 건축 속의 자연은 항상 자연의 훼손이라는 원죄를 씻기 위한 최적의 도구였다.

 

21세기에 들어 건축은 보다 대담하게 자연으로 위장한다. 지붕에 풀을 심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외벽 자체가 거대한 수직 정원이 되기도 한다. 100m가 넘는 마천루 꼭대기에도 예외 없이 나무로 채워지는 것은 뜬금없기도 하고 자연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이러한 위장을 통해 생태적이며 친환경적인 건물로 포장된다.

 

유서 깊은 자연의 위장술보다 한 단계 더 뻔뻔한 방식도 있다. 그것은 각종 에너지 기준을 수치화하여 보다 더 기밀성에 치중함으로써 폐쇄적인 공간을 만들어 친환경적이라 하고 태양광 패널의 개수가 건물의 지속 가능성에 정비례한다는 반쪽짜리 논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이론서인 <건축십서>는 건물을 비롯하여 도시의 설계에 이르기까지 햇볕, 공기, 물과 같은 자연요소의 총체적 조화를 통한 건축의 원칙들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 전통건축의 기저도 자연과의 조화였다. 수도 한양은 산과 강의 질서에 따라 순응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지난 시대 위대한 건축가 벅 민스터 풀러는 “환경이나 에너지의 위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무지로 인한 위기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범지구적 차원에서 자원의 네트워크화를 통해 한정된 자원의 불균등한 분배와 낭비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렇듯 선인들이 총체성에 관해 큰 원칙을 세운 것과는 반대로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든 표피적 차원에 치중하여 친환경의 껍데기를 씌우는 것에 많은 노력과 자원을 소비하는 듯하다.

 

<조진만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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