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포도맛, 폭염

우주의 특징 중 하나는 예측 가능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더워도 틀림없이 가을이 온다. 절기는 반복되며 더위는 서리를 예고한다. 더위를 견뎌내고 우리는 가을을 맞을 것이다.

 

익힌다는 것은 맛을 응축한다는 뜻인데, 서늘한 가을의 과일 맛은 여름의 폭염에서 비롯한다. 폭염이 맛을 과일 안에 깊게 응축시키고 있는 셈이다. 멀리 남원의 포도밭을 찾았다. 땡볕에서 농민들이 수확을 시작하고 있다. 지금부터 맛이 들었으며, 아무래도 추석 전에 가장 맛있을 것이라고 한다.

 

 

전국 포도 명산지의 다수는 특별한 기후를 타고났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서늘할수록 맛이 좋다고 한다. 해발 고도가 있는 산간이 유리하다. 밤에 더위가 식으면, 과일도 스트레스가 풀리고 쉴 틈이 생긴다. 밤의 선선한 기온은 과일이 더 단맛을 농축하려는 본능을 일으킨다.

 

포도밭 한가운데는 포도 향이 향기롭고 달아서 어질어질하다. 알 솎기라는 기술을 동원해서 포도 모양이 예쁘고 맛이 더 좋아졌다. 포도 한 송이당 100개의 알이 달린다고 치면, 서른 개는 미리 솎아내어 당도를 높이고 포도 모양도 예쁘게 유지하는 방법이다. 손으로 일일이 하는 수밖에 없는 고된 작업이다. 사방 2m70짜리 정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자라는 포도나무에 들이는 공은 자식 농사보다 훨씬 힘들다. 포도 알의 때깔 좋으라고 봉지를 씌워야 하고, 비가림막을 펼쳐서 당도도 적절하게 유지해줘야 한다.

 

고단한 한 해 농사를 거의 마치고, 이제 수확의 기쁨을 누릴 시기다. 그러나 농민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작년 올해 연속으로 작황은 좋은데, 가격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장마가 짧았고, 일조기간이 긴 데다가 적당한 폭염은 포도의 품질을 높였다. 과일 맛이 좋아서 가격이 떨어지는 모순은 농민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농사는 아무리 첨단 기술이 도입되어도 기본적으로 하늘과 동업하는 일이라 좋은 날씨가 지속되면 양이 늘고 품질도 좋아진다. 과일은 부패하므로 아주 싸고 좋다고 해서 마구 사서 저장해놓을 수도 없다. 출하도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 지금부터 추석 무렵까지 빤한 출하시기를 놓고 농민들은 팔자에 없는 눈치싸움을 해야 한다. 포도가 시쳇말로 썩어날지도 모를 판인데, 도시에서 먹는 과일은 수입품과 가공된 수입 과일이 태반이다. 말리고 얼린 열대과일이 지천이고, 주스나 음료, 케이크에 들어가는 재료도 우리 과일은 결코 흔하지 않다.

 

이 불편한 사정이 도대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 농촌에 손도 없고, FTA 피해보전 직불금을 받기 위해 아끼는 포도나무를 뽑아버리는 농가도 늘고 있다. 다른 나라에 자동차 몇 대 더 팔기 위해 희생되는 것이 우리 포도나무라니. 남원 산자락은 아직 맹렬한 햇빛으로 자글자글 끓고 있었지만, 함께 끓는 건 농민들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포도를 더 많이 먹는 것밖에 없는 것일까. 포도는 어쩌자고 올해는 그리도 더욱 맛이 좋은지.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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