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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의 눈이 필요한 ‘네 번’

염소와 수학자 피타고라스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물론 아무 관계도 없다. 하지만 우주의 이치는 때로 오묘한 것이고, 예술의 재치는 가끔 기발한 것이어서 서로 다른 위치에 세워진 점 사이에 선을 그으면 하나와 둘, 둘과 셋, 그리고 셋과 넷 사이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관계를 창조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우주의 원. 예술의 곡선. 그 사이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세상의 능력.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네 번>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자연의 익살을 보여준다. 

 

어떤 대사도 없는 영화. 그러니까 자막도 없다. 게다가 음악도 없다. 어쩌면 이야기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남부 이탈리아의 시골 촌구석 카라브리아. 심지어 시간조차 멈춘 것처럼 보이는 작은 동네. 참숯을 만드는 재가 하늘에 날린다. 염소 치는 노인은 기침 때문에 고생하는데 그는 염소의 젖을 바치고 교회의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나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운명을 달리한다. (검은 페이드) 어린 염소가 태어나서 홀로 서지만 그는 무리들을 뒤쫓다가 그만 뒤처져서 커다란 전나무 아래 잠든다, 혹은 죽는다. (검은 페이드) 마을에 축제가 다가오자 사람들은 큰 전나무를 베어서 마을 잔치를 벌인다. (검은 페이드) 그 나무를 잘라서 참숯을 만든다. 그 재가 하늘에 흩날린다. (검은 페이드) 그리고 끝. 네 개의 에피소드. 네 번의 페이드 인 아웃. 그리고 네 번의 계절. 

신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는 개의치 않는다. 대신 고대 그리스의 신비주의 수학의 이론을 꺼내든다.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사(4)라는 숫자는 인간이지요. 인간은 네 가지 연속적인 삶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해골을 가지고 있으니까 광물, 수액(樹液)처럼 혈관을 타고 피가 흐르니까 식물, 움직이니까 동물, 그리고 이성적인 존재. 그러므로 이 네 가지의 과정을 알아야만 인간을 아는 것이지요.” 재에서 시작하여 염소 치는 늙은 노인을 거쳐 어린 염소, 길 잃은 어린 염소가 누운 전나무, 그리고 전나무를 불태운 다음 남은 참숯. 재에서 재로. 마치 끝말잇기처럼 이어진 순환. 우리는 어디까지 그의 말을 믿어야 할까.

말 없는 이미지들. 바람과 햇빛과 그림자. 흙과 먼지. 계절의 이동. 피타고라스는 수와 비례를 통해서 우주의 조
화를 믿었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직선과 곡선의 힘, 세상의 시작으로서의 영혼. 그럴지도 모른다. 프라마르티노가 따라가는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의 순환이며 여행이다. 어쩌면 거의 선(禪)의 테크닉. 일종의 내기. 

만일 그저 네 개의 에피소드만을 보았다면 유감스럽게도 당신에게는 영혼을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셈이다. 물론 당신은 내게 영혼을 볼 수 있느냐고 항의할지 모른다. 아뿔싸! 프라마르티노는 지금 허풍쟁이 도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그는 친절할 뿐만 아니라 매우 의미심장한 유머를 안고 우리를 인도한다. 하나의 예. <네 번>은 거의 모든 장면에서 카메라가 멈춰 서 있다. 그런데 한 장면에서의 놀랄 만큼 인상적인 롱 테이크,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마을 부활절 행사 신은 편집 없이 거의 8분이 넘는다.

아마도 영화 전체를 다소 익살맞게 비유하는 부활과 환생의 과정에 관한 느린 은유. 카메라는 예수 행진과 이들을 놓친 성가대 아이 사이에서 가로막고 나선 사나운 개를 따라서 좌우로 네 번 반복해서 커다란 패닝을 한다. 이때 동선은 그 사나운 개를 따라간다. 그 개는 얼마나 연출의 지시를 이해한 것일까. 동물과 사람들. 우연과 질서. 그 사이에서 오로지 카메라를 좌우로 움직이는 것 이외의 어떤 개입도 하지 않겠다고 연출의 결단을 내린 프라마르티노의 영웅적인 모험. 그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시골 마을의 일상. 이때 우리는 거기서 이 모든 순환이 서로 유기적인 하나의 총체적인 우주라는 것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영화의 시간과 운동을 볼 수 있는 인내와 볼 줄 아는 지성이다. 

말하자면 <네 번>은 우리에게 영화를 보는 방법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중이다. 영화를 보는 방법? 그렇다. 멈춰 선 카메라는 우리들로 하여금 화면 이미지 안에서 보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선택하게 만든다. 그만큼 프라마르티노의 카메라는 뒤로 물러서 있다. 이 영화는 그 누구의 시선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뒤로 물러나 있거나 종종 지붕위로 올라가서 우두커니 내려다본다. 몇 번이고 같은 위치에서 반복되는 장면들. 그 안에서 시간은 지나가고 다시 돌아온다. 동일한 것과 달라진 것. 누군가의 영혼은 떠나가고 누군가의 영혼은 옮겨갈 것이다. 어떤 감상주의도 개입할 여지가 없는 영혼의 순례에 관한 (내게 다소 유머를 허락한다면) 피타고라스적 풍경들. 

어떤 영화는 보는 내내 우리를 바보 취급한다. 이야기는 우스꽝스럽고 장면은 대부분 아동용 게임에 가깝다. 반대로 <네 번>은 당신에게 현자의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기를 요구한다. 그런 다음 세상의 질서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우주적 순환의 미세한 사건들은 당신의 뇌와 눈으로 선택받기를 기대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이다. 하지만 왜 당신은 눈으로 보면서 뇌로 생각하지 않는가? 만일 당신에게 대사가 필요하다면 수없이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희미해져가는 노인의 심장. 새로 태어난 염소의 심장. 두 개의 심장. 전나무에서 들려오는 박동. 만일 당신이 음악을 요구한다면 죽어가는 노인의 무거운 발자국 소리와 염소들의 목에 걸린 워낭소리와 전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마도 거기 영혼이 머물다 다른 자리로 옮겨갔을 것이다. 특수효과 따위가 왜 필요한가. 미켈란젤로 플라마르티노는 그것을 충분히 볼 수 있다고 우리를 신뢰한다. 당신은 영화에서 이런 믿음을 받아본 적이 얼마나 있는가.

우리는 자기 마음에 자신만의 소중한 유니버스가 있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네 번>을 외면하는 것은 그 믿음에 등을 돌리는 행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