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한가지

(1) 엄홍길 - 셰르파의 죽음

엄홍길 | 산악인


1986년 겨울, 히말라야에서 에베레스트와 맞서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물여섯. 근육은 단단했고, 힘줄은 팽팽했다. 서울 도봉산 아래서 태어나 밥먹듯이 산에 오르며 자랐으니 산에서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자신감이 있었다. 등반기술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한국 최고라고 생각했다. 절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에베레스트 남서벽도 충분히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1985년 처음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가 한 번 실패했지만 두 번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정상 등정 없이 빈손으로 귀국한다는 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해외여행 자체가 특권이던 시절, 한 번 히말라야에 온다는 것은 집을 팔든가 아니면 전세방이라도 빼야 가능할 만큼 목돈이 들었다.

그 시절 산악인이라면 정상공격조가 아니라도 히말라야 원정대에 낀다는 것 자체를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엄홍길 '히말라야 16좌' 세계 첫 도전-로체샤르봉을 향하여 | 2006.04. <경향신문 DB>

히말라야는 만만치 않았다. 8000m급 정상으로 가는 길은 칼날을 밟고 가는 길이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추락할 수 있다. 운이 없으면 눈이 살짝 덮인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 생긴 틈)에 빠질 수도 있다. 정상을 오르는 길이 옆구리에 죽음을 끼고 걷는 길이라는 걸 그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그러다 첫 사고가 발생했다. 바위처럼 단단했던 의지가 진흙처럼 물러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짐 수송을 하는 길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해발 7500m쯤에서 암벽을 타던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추락했다. 공처럼 몸이 통통 튀더니 1000m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서둘러 도르지를 찾으러 달려갔다. 찢어진 배낭, 피묻은 옷자락만 바위에 끼어 있었다. 처참한 죽음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시신은 없었다.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팡보체라는 셰르파 마을에서 그의 어머니와 부인 학파디기를 만났다. 가족들은 나를 원망했다. 셰르파 도르지 부인의 나이는 당시 열여덟. 결혼한 지 넉 달밖에 안된 신혼이었다. 울먹이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내가 먼저 앞서가야 했어.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고통으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한 사람을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 히말라야에 다시 오르고 싶지 않았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히말라야는 자석처럼 마음을 끄는 힘이 있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세번째 도전만에 8000m급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이후 2000년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하늘의 별에 견주는 히말라야의 8000m급 대표 봉우리 14좌를 하나하나 올랐다. 2007년까지 합하면 16좌를 완등했다. 1985년부터 22년 동안 38번 도전해서 얻은 성과다. 그 대신 히말라야에서 나는 산악인 6명, 셰르파 4명 등 모두 10명의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다.

히말라야에서 등반대장의 결정은 한 사람의 운명과 생사를 가를 수 있다. 폭설이 4~5일쯤 내리고 나면, 이후 3~4일 정도 맑은 날이 이어진다. 하루 정도 쉬었다 산에 오르는데, 막 내린 신설(新雪)은 다져지지 않아서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어 위험하다. 동료가 사고사를 당할 때마다 ‘차라리 내가 죽었어야 한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나는 지금 그들을 위해 살고 있다. 2008년 5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한 뒤 산에서 숨진 셰르파들과 그들의 남겨진 가족,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있다. 히말라야 자락에 사는 네팔 사람들이 공부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 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2010년 5월5일 1년간의 공사를 마치고 팡보체에 첫 학교를 준공했다. 첫 학교를 팡보체 마을로 정한 것은 함께 등반하다 사망한 셰르파 도르지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네팔의 타루프 마을에 2호 학교를 세웠다. 세번째 학교는 내년 2월 네팔의 룸비니에 들어설 예정이다. 

셰르파 도르지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회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