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미배의 Music Story

[Concert Review] 오페라 A House in Bali

인도네시아의 전통음악인 '가믈란'만큼 현대 서양 작곡가들에게 많이 어필한 비서구 전통음악이 있을까 싶다. 드뷔시, 메시앙, 케이지, 리게티, 글래스 등, 유명 작곡가들을 보면, 가믈란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수년 전, 인도네시아 발리에 여행을 다녀온 한 선배가 그곳에서 가믈란 음악을 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음악이 얼마나 매력이 있고 깊이가 있는지, 수많은 현대음악가들이 그 음악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야 아직 발리에 가 볼 기회가 없었으니 대체 어떤 요소가 그리도 매력있다는 것인지 별로 알 길이 없던 차였는데, 한 미국 친구가 BAM (Brooklyn Academy of Music)에서 인도네시아의 가믈란을 바탕으로 한 <A House in Bali>라는 오페라가 세계초연될 거라는 소식을 알려줬다.      

 


오페라 <A House in Bali> 트레일러
트레일러만 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이 오페라의 작곡가는 에반 지포린 (Evan Ziporyn. 1959년 시카고 출신). 한국의 청중들에게 그리 알려진 작곡가는 아니지만, 현재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미국의 현대음악가들이 속해 있는 Bang on a Can All-Stars의 멤버이고, MIT 대학의 교수이다. 그의 음악 스타일을 이야기할 때, "post-minimalist" 혹은 "가믈란 음악"이라는 단어가 핵심어로 등장한다.

지포린은 20대에 인도네시아의 가믈란을 처음 듣고 음악적으로 "개종"했다고 표현할 만큼 가믈란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인도네시아로 떠나 가믈란 악단에 들어가 악기를 배우면서 그가 이전까지 알고 있던 음악과는 너무나도 다른 새로운 음악을 몸소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가믈란에 사용되는 민속 악기들을 연주하는 연주자로, 그리고 가믈란 음악의 요소들을 자신의 곡에 담아 음악을 만들어내는 작곡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포린의 인터뷰 동영상.
(한글 자막이 제공되지 않아 죄송 ^^ 얼굴 확인용입니다.)


오페라의 이야기는 동명의 비망록 <A House in Bali>에서 가져왔다. 1930년대, 파리 거주 캐나다인 작곡가 콜린 맥피(Colin McPhee)는 파리에서 발리 가믈란 음악을 듣고 영감을 얻어, 바로 발리로 음악을 찾아 나서게 된다. 부인인 인류학자 제인 벨로(Jane Belo)와 함께. 발리에서 6개월을 보낸 후, 이 부부는 다시 파리로 돌아가지만, 문화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이 지역의 음악을 그대로 두면 얼마 가지 못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에, 다시 발리로 향하게 된다. 1932-1935년, 1937-1938년 이렇게 두 차례, 발리에 머물며 발리의 음악을 채보(악보로 옮기는 일)하고 촬영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 맥피가 발리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들이 책 <A House in Bali>로 출판이 되었다고 한다.


오페라 각색에서, 작곡가 맥피는 영감을 찾아 발리로 와서 서양인들이 모여있는 작은 지역에 머무르며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 미술가 월터 스피스(Walter Spies)를 만나게 된다. 이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서 낯선 나라를 찾아 나선 서양인들의 고민과 갈등, 그들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는 경험, 그들이 이 지역 문화를 받아들이는 관점의 차이들이 드러난다.

흥미로운 것은 세 가지 레이어로 구성한 무대였다. 무대의 맨 뒤 쪽에서는 실제로 원작의 주인공 맥피가 촬영해 놓았다는 발리 가믈란 음악의 연주 장면들이 아주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앞의 오른쪽에는 가믈란을 연주하는 인도네시아 전통 악단들과 최소한의 서양악기로 구성된 앙상블이 오페라 작곡가 지포린에 의해 지휘된다. (오케스트라 공간이 무대와 분리되어 따로 마련되어있는 전통적인 오페라와 달리, 악단이 무대 공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 왼쪽에는 주인공 맥피가 살고 있는 집의 작은 방이 세트로 마련되어 있다. (물론 밖에서 안이 들여다 보이는 구조이기는 하지만) 이 방 안에서 일어나는 일과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얼굴 표정들은 카메라로 찍혀, 세트의 위쪽에 마련되어 있는 스크린에 띄워진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클로스업하는 스크린-현재 사건들이 펼쳐지고 있는 세트-과거의 모습을 담은 영상배경의 3단 구성이었다. 무대의 맨 뒤쪽 배경에 펼쳐지는 영상이 1930년대의 실제 모습이라면, 세트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의 재현이고, 세트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현실이라면, 스크린에 보이는 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끄집어 내고 있었다. 세 가지의 층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에 동시에 관심을 기울이며 오페라를 따라라기가 좀 산만하기는 했지만, 재미있는 시도였다.   

 

무대의 오른쪽을 차지하고 있던 발리 전통 가믈란 앙상블


위의 작곡가 지포린에 대한 이야기와, 원작 책을 쓴 맥피의 이야기에서 비슷한 점을 이미 눈치채신 분들도 있을 것 같다. 둘 다 작곡가였고, 발리 음악에 심취하여 발리로 떠났었다. 특히 맥피의 경우 (오페라의 아리아 가사로도 등장하는데) '음악적인 영감이 바닥나 어떤 곡도 작곡할 수 없던 시기'에 새로운  음악적 원천을 찾아 발리로 떠난다.
하지만, 실제 맥피의 훗날 이야기를 찾아보니, 맥피는 발리에서 수년간을 보낸 후 다시 파리로 돌아오지만 자신의 곡을 많이 작곡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결과적으로 작곡가로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다). 반면, 지포린은 발리에서 얻은 음악적인 영감과 소재를 자신의 음악 속에 훌륭하게 섞어내면서 그만의 음악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미국에서 매우 각광받는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사로잡은 가믈란의 힘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음악을 들어보니, 일단 금속 소재로 된 여러 대의 타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음색이 마치 절의 풍경소리를 모아놓은 듯 참 맑고도 화려하다. 다양한 악기들이 함께 연주하는 이 앙상블 또한 우리나라의 시나위처럼 즉흥연주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 한데, 어떤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면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 반복되는 듯 하면서 변형되는 양상이, 미니멀리스트들이 이 음악에서 영감을 얻었던 이유인가 보다.

지포린의 음악이 post-minimalist라고 불리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인도와 인도네시아의 음악에 영향받아 시작되었다는 필립 글래스의 미니멀리즘 음악이 지나치게 반복적이고 조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너무 단순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까지 주는 반면, 지포린의 음악은 가믈란 음악이 지닌 장점들을 크게 훼손하지 않고 현대의 작곡기법과 잘 섞어냈다. 미니멀리스트의 음악보다는 음악적으로 보다 다양하고 풍성한 느낌을 만들어 냈다.

잠시 곁다리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등장하는 발리 씬. 영화로 만들면 이런 이야기 정도 밖에 안 나올 줄
알고는 있었지만, 미국 작가님의 거창한 자아찾기는 발리라는 'exotic space'에서 소박함을 가장한 'extravagant'한 비주얼을 제공하며 마무리된다. (개인적으로 책으로 읽었을 때 작가의 진실성이 느껴져서 더 나았던 것 같다.)


몇주 전에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Eat, Pray, Love)>를 책과 영화로 본 이후, (특히 주인공이 발리에 머무는 부분에서) 서양인들이 '발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이 남다르구나 싶은 생각은 했었는데, 오페라에서도 '발리'를 이야기 한다니 갑자기 왜 이리 발리를 가지고들 난리인가 싶었다.
나중에 이 오페라를 소개해줬던 친구에게 물어보니, 글래스 같은 미니멀리스트 이외에도 미국의 현대 작곡가들 가운데 하나의 라인, 전통을 이룰만큼 가믈란 음악의 영향을 받은 음악가들의 무리들이 있다고 했다.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말씀. 미국 음악가들의 발리 음악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중후반을 관통하는 생각보다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세계 초연인지라, 내용도 모르고 음악도 모르며 보다가 조는 것은 아닐지 내심 걱정했는데, 끊임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구성의 악기 앙상블과 민속무용, 아리아들 때문에 졸 틈도 없이 1시간 반이 흘러갔다. 짧아서 더욱 좋았던... (이 글도 너무 길어졌다. 짧은 것이 미덕인데...)

오페라 <A House in Bali>는 영감이 고갈된 작곡가, 다른 나라 음악의 채보를 위해 그 나라로 떠난 서양인 (이건 오늘날에도 종족음악학자들이 많이 하는 작업), 동양으로 떠났던 초창기 서양인들의 관점들(등장인물로 작곡가/인류학자/화가가 등장하는 것도 무척 상징적이다), 이런 조금은 무게 있는 이야기들이 얽혀있는 작품이었다.
이런 소재로도 오페라가 만들어지냐고 반문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이런 소재로 오페라를 만들어도 뉴욕에서는 매진이 되더군요...^^) 아무튼,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등의 이분법 사이에서 나타나는 여러가지 이슈들을 무대예술의 형태로 잘 엮어낸 흥미로운 오페라였다.


10/16/2010 @ B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