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이미배의 Music Story

[Films on Musicians] 현대와 만나는 중세: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일대기 <Vision>

요즘 세상돌아가는 모양새가 80년대도 아니고 '중세'라는 말을 들었다. (매우 암울하단 말씀...) '중세=암흑기'의 메타포는 어디서부터 시작된걸까? 진짜 중세시대는 그렇게 암울했을까

잠시
, 지식iN에서 검색을 해보니 그 중 한 답변이 재미있다.   

질문
: 중세시대가 왜 암흑기죠?
: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은 살았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신에 의지한 종교의 권위가 너무 강해서 고대에 발달하던 철학,조각,자연과학,건축,법률 등의 분야에서 더이상 눈에 띄는 진전이 없던  정체기였지요..모든 학문조차 신학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던 시기가 바로 중세입니다

이런 답변들을 볼 때 마다 그 간단명료함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진짜? 진짜 그랬을까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 종교적인 vision (환영, 혹은 예지력)을 받으며 그것을 적어가고 있는 그림


서양의 중세시대 하면, 기껏해야 아주 큰 서양의 박물관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위의 그림 같은 낯선 설정의 그림들로 짐작해볼 수 밖에 없다. 또 이런 그림의 종교적인 의미나 배경, 세세한 동작의 의미시대적인 맥락 같은 것은 전문적인 지식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이런 와중에 현대인을 위한 중세시대 시청각 교재(?)가 등장하게 되었으니, 바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Vision>이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이라는 이름은 고음악애호가라면 어디선가 들어봤음직한 이름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이름일 것 같다이름 그대로 보자면, 빙엔 출신의(von Bingen) 힐데가르트(Hildegard). 이 인물에 대해 거슬러가보자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1000년 전독일의 라인강 주변 지역에서 수녀원을 맡아 이끌며 종교활동을 했던 수녀님이시다
음악계에서 이 이름이 알려진 이유는그녀가 음악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작곡가이기 때문. (태초 이래로 음악을 처음 만든 여성분이 이분이 처음은 아닐텐데, 이런 수식어는 사실 조금 부담스럽다. '음악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여성' 정도로 말해두면 어떨까 싶다.) 다른 업적들로도 유명한 중세시대의 수녀님이신데, 현대에 그 기록이 발굴되고 연구되면서, 중세시대의 여성, 중세시대 여성 음악가의 대명사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영화 Vision 속, 중세 수도원의 재현 그림이 아닌 이런 사실적인 재현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영화 Vision의 영문 트레일러>2009, 마가레테 폰 트로타 (Margarethe von Trotta) 감독작


영화는 어린 힐데가르트가 수도원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시작된다
. 당시는 신에 대한 복종과 참회를 스스로에 대한 고통(신체적 학대, 고문)으로 드러내던 시기. (영화 <다빈치 코드>의 하얀 머리 Silas가 참회를 위해 밤마다 철심들이 박힌 쇠사슬로 스스로의 몸에 고통을 주던 장면을 떠올리시면 되겠다.) 
신에 대한 자신의 참회를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쇠못 채찍질로 하고 있는 수도원의 수도사, 수녀들이 어린 힐데가르트의 눈에도 참으로 고통스럽게 비춰진다. 화면으로도 지켜보기엔 괴롭지만이것이 앞으로 펼쳐질 영화 이야기의 주요 암시가 된다. 어떻게 스스로에 대한 고통이 아닌 방식으로 참회하고, 영혼을 다스리고신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잠시힐데가르트는 곧 성인이 되고, 그를 딸처럼 사랑해줬던 수녀원장 역시 참회를 위해 스스로에게 물리적 고통을 주다가 그 상처가 썩어들어가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랑하는 이들을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던 힐데가르트는, 후대 수녀원장으로 선출된 이후우선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약학을 공부하게 된다각종 식물들, 돌들의 특성을 익히고, 직접 약에 쓰일 것들을 기르고, 채취하고, 다른 수녀들과 함께 그 지식을 나누며수도원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해준다.      


약초에 대한 지식을 나누고 있는 힐데가르트


사람을 정신적으로 치유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음악. 힐데가르트가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바로 환자들의 치료 때문이다. 고통받고 있는 이들에게 힐데가르트는 노래로서 신의 메세지를 전하고, 사람들에게서 영적인 힘을 북돋는다.

어린 시절부터 일종의 종교체험인 "vision" (신으로부터 예지능력을 받는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을 경험했던 힐데가르트는 다시금 "vision"을 통해 신의 말씀, 계시를 받아들이게 되고, 이 능력이 지역 교구의 종교회의에서 인정되면서 교회 내에서 힐데가르트의 입지는 더욱 더 강력해져 간다
이에 따라 그녀를 시기하는 수도사들(남성)과의 반목도 더욱 심해진다이 대목에서 힐데가르트가 남녀 불평등의 문제에 어떻게 맞서는지, 감독은 '페미니스트로서의 힐데가르트'의 면모를 그려주려 했던 듯 하나힐데가르트가 불의, 불평등에 맞서다가 생긴 문제들이 대부분 결국은 외부적인 힘(교회 내 더 높은 권위자나 귀족의 개입)에 의해 해결되는 시대적 한계만 드러낸다
아무리 남성 수도사들이 힐데가르트와 반목할지라도늘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이야기 통하는 남자인 친구 하나는 있음직(감독은 남성 전체를 여성의 적으로 만들지 않는다.)--폴마르(Volmar) 수도사는 늘 힐데가르트의 옆을 지키면서 힐데가르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준다.
 


폴마르 수도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힐데가르트

 
이야기는 힐데가르트를 무척이나 존경하여 종교에의 귀의를 결심한, 영주 가문 출신의 소녀 리하르디스(Richardis) 등장하면서 또 다른 국면으로 흘러간다. 리하르디스는 힐데가르트를 따라다니며 힐데가르트를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적고, 힐데가르트의 지식들을 옮겨 적어 문자화 하면서 힐데가르트의 중요한 제자가 된다. 등장 초반의 리하르디스는 힐데가르트에게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보내며 그녀에게 헌신한다.(단순히 윗사람에 대한 존경이라고 보기에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감정표현이 있다.) 
그러나, 수년 후, 리하르디스가 가정사정상(?) 수녀원을 나와 '영주'가 되게 되면서그 관계는 깨지게 되는데리하르디스의 사랑을 받기만 하던 힐데가르트가 오히려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한다.(힐데가르트가 더욱 리하르디스를 아끼고 있었던 것여기서도 또한 단순히 윗사람-아랫사람의 관계라고 하기에는 묘한, 애정관계의 암시가 풍긴다
하지만, 폴마르 수도사와의 관계도 그렇고, 리하르디스와의 관계도 그렇고, 어느 쪽도 세속적인 눈, 혹은 현대적인 눈으로 판단하기에는  애매하다 싶은 부분들이 많다.        

 

힐데가르트의 말들을 글로 옮기고 있는 리하르디스

 

리하르디스의 엄마와 오빠. 그 말로만 듣던 중세 '봉건 영주' 가문 분들이시다. ㅋㅋ박물관 그림 속에서나 봤음직한 복장들이 이렇게 재현되었다.

 
영화는 이렇게 힐데가르트라는 인물이 지닌 다양한 면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지자, 수녀원의 독립을 이끌어낸 종교지도자, 다양한 분야의 학자, 음악가, 초기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까지, 현대에 그녀가 주목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하나하나 드러난다힐데가르트는 중세 '암흑기', 이렇게 다양한 영역에서 분명한 비전(vision--앞서 영문 'vision'으로 표현했던 종교적인 의미와는 좀 다르다.)을 가지고 있었다.
현대의 눈으로 보면, 별다르게 '위인'이라고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한 수녀의 삶이지만여러 가지의 제약이 많았던 중세시대에 이런 비전을 품고, 다양한 영역에서 자신의 생각을 펼치고, 그것을 실천해 나갔다는 점은 참 대단해 보인다.       

물론, 종교가 지배하던 시기, 종교의 중심 수도원에서 살았던 종교인의 모습이 그려지기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이 공간은 암울하지 않다.
약초를 재배하고
, 그것들로 아픈 이들을 고치는 모습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 심신을 치유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도 떠올려볼 수 있고수녀들이 아름다운 하얀 드레스를 입고 성서 속의 이야기를 노래극으로 만들어 즐기는 모습은 오늘날의 음악극들을 떠올리게까지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 복식, 그 외의 소품들이 참 세심하게 선택된 것이, 마치 서양 유명 박물관의 '중세시대관' 발품 팔지 않고 한꺼번에 관람하고 나온 느낌을 준다
암흑기라고만 생각했던 미지의 세계가, 현재, 우리의 눈 앞에서 현대와 함께 숨쉬고 있음을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은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암울한 시대에도 비전을 지닌 탁월한 인물은 있고그들의 비전은 암흑 속에서도 세상을 보다 살만한 곳으로 만들었음을.        


Vision 영화 포스터. 힐데가르트 역을 맡은 바바라 주코바(Barbara Sukowa)의 배우로서의 포스가 참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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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들어봤다 싶을 법한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음악. 개인적으로 중세음악에 이렇게 리듬악기 깔아서 remix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이름을 알려지게 한 가장 대중적 노래가 이 

 

요런 연주도 있다지친 몸과 마음 달래기에는 이런 연주가 더 낫지 않을지. ^^


(
포스팅에 사용된 이미지는 모두 공개된 소스에서 가져왔습니다.)